◇.역사·고서화

광개토태왕능과 장군총

산야초 2016. 1. 19. 21:49
  • 1500년간 당당히 숨쉬어온 우리역사 고구려

  •   광개토태왕능과 장군총

    집안 지역에 이렇게 1400 년 이상된 고분이 약1 2000개 이상이 있으며 장군총만이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서문

    광개토태왕능과 장군총

    고구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BC37년에 건국되어

  •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과 20대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에

  •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668년(보장왕 27) 나당(羅唐) 연합군의  멸망하였다.

    처음 들러본 고구려 유적은 내가 과거에 아련히 생각해왔던
    상상의 고구려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완전히 압도하였다.


    장군총은 시조인 동명왕릉,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릉이란 주장들이 있다

    진정 우리의 역사라는것을...  반드시 우리의 것으로 되찾아야 한다는것을 ...
    현실속의 바로 우리역사라는것을 절절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그가 바로 우리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둘레에는 각 면에 3개씩 총 11개의 호석이 남아있다.(원래는 12개) 무덤이 무너짐을 방지하고,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대놓았다.

    집안지역의 고분군과 성벽등 각종 유적지를 둘러보며

  • 1500년 이상의 우리의 역사가  당당히 숨쉬고 있다하니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 한편으로는 우리가 제대로 인식도 못하는사이 지금은 남의 땅이되어 동북공정이니하며

  •  다른나라 역사로 편입이 이루어진다하니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우리의 유적을 보며

  •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장군총 바로 옆에는 장군총 1/4크기의 배총이 딸려있다. 왕의 첩이나 부하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한다 원래는 다섯기가 있었다고 한다.



    태왕릉은 높이18m 한 면의 길이 66m의 엄청난 크기이다.
    동방의 금자탑이라는 장군총과 꼭 같은 양식이나 크기는 보다 무려 네 배가 더 큰 피라미드이다.



    멀리서 바라본 광개토태왕릉 앞쪽에 보이는돌을 길게 쌓아놓은 부분이 제단역할을 하던 곳이다.



    태왕능좌측촬영



    뒤쪽으로 용산이 보인다.



    광개토태왕 무덤내부 공안의 눈을 피해 촬영을 감행하였다. 안쪽으로 관을 놓았던 관대만이 보인다.



    유리관속에 갇힌 광개토태왕비 촬영도 함부로 할수없는 슬픈 현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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