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고흐는 잘 알아도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를 살다간 우리나라 화가 중 최고의 기인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1786?)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스스로를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범상치 않았던 최북은 또한 자신의 이름 ‘북(北)’자를 반으로쪼개어 ‘칠칠(七七)’이라고 불렀다. 당시 중인계급의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그림을 잘 그려 명성을 얻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 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 산수(崔山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그는 엄격한 신분제에 대한 반항심과 화가로서의 자존심, 술과 기행으로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이런 파란만장한 최북의 삶은 숱한일화를 남겼다.
최북 자화상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칠칠이’
최북이 보여준 기인의 면모는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에 잘 나타난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귀가하는 나그네를 그렸다. 그림 속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에서 최북의 거침없는 성격과 그의 고달픈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지두화(指頭畵)’로 알려져 있다.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으로 그의 손놀림에 불 같은 성격과 광기가 더해져 있다.
강변한거江邊閑居
‘그대는 최북이가 눈 속에 죽은 것을 보지 못했는가?
작품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는 중국 당나라 사람 逢雲宿芙蓉山主人 봉설숙부용산주인 劉長卿(유장경)의 詩를 그림에 담은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日暮蒼山遠 일모창산원 해 저물고 푸른 산은 아득하니 天寒白屋貧 천한백옥빈 날은 찬데 초가집 한채 궁색하구나 柴門聞犬吠 자문문견폐 자문(싸리문) 안 개 짖는 소리 들리니 風雪夜歸人 풍설야귀인 바람불고 눈오는 이 밤 그 누가 돌아오는고"
唐詩 (중국 당대(唐代:618~907)에 지어진 시의 총칭. 단 오대(五代)의 작품도 포함됩니다.)의 발전단계는 초당(初唐 618~712))·성당(盛唐713~765)·중당(中唐766~835)·만당(晩唐836~907)의 4시기로 구분되는데 逢雲宿芙蓉山主人 봉설숙부용산주인 劉長卿(유장경) 당나라 사람으로 중당시에 이름을 날린 사람입니다.
최북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이. 호 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 초명 식(植)입니다. 호생관이라는 호는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이고, 칠칠이라는 자는 이름의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하였으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지요. 김홍도·이인문·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였으며, 스스로 눈을 찔러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하였다 합니다. 주유 중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적도 있습니다.
답설방우踏雪訪友
격외선당(格外仙堂) - 최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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