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강희안의 작품세계

산야초 2016. 3. 13. 22:46

1417(태종 17)~1464(세조 1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강희맹의 형이기도 하다.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소박하고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는 않는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그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가 사신으로서 중국을 다녀와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되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하였다.

세종 때 금인 소신지보와 세조 때 을해자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최초의

원예서로 알려진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강희안이 직접 화초를 키우면서 알게 된 화초의

특성과 재배법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노송,매화,국화,석류화,치자화,귤나무 등 모두

17종의 꽃과 나무, 그리고 이를 기를 때 주의해야 할 일곱 가지 항목으로 구성됐다.

책이 국내 최고(最古)의 원예서라는 점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꽃과 나무의 품격과

상징성을 서술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천하를 다스리는 뜻을 함께 담아냈다는 점이다. 지각도

운동능력도 없는 풀 한포기의 미물이라도 그 풀의 본성을 잘 살피고 그 방법대로 키운다면

자연스레 꽃이 피어난다는 책은 단순한 원예서를 지나 수신과 치국의 책이다.


 조선초기의 작품들은 사실 현존하는 것이 드물다. 임진란을 겪으면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 또는 일본으로 유출되었기에 국내에서 발굴되는 것이 매우 적은 편이다. 강희안의

작품들도 현재 세상에 빛을 본 것은 아래의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개인 소장이나 그 외의

다른 곳에 그의 작품이 살아 있다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작품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비단에 담채  .22.2cm *2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희안의 〈고사도교도〉는 조각난 그림이어서 전체적인 구도를 알 수는 없으나

여기에서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 선비와 동자를 그리고 있다. 인물의 동작이나 물결, 다리

등 세부를 자연스럽게 묘사하여 강희안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위는

부벽준을 쓰고 있으며, 인물의 옷 주름선도 자연스럽다. 이 외에도 〈절매병도(折梅甁圖)〉,

〈개문도(開門圖)〉 등이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모두 비슷한 화풍을 보여 이 그림과

같이 어떤 큰 그림에서 잘려진 작은 그림으로 생각된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종이에 수묵 23.4*15.7cm

국립박물관 소장


 화면의 오른쪽에는 덩굴풀이 흘러내리는 절벽이 있고, 절벽 아래에는 바위 위에 선비가

턱을 괴고 엎드려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의 왼쪽 중앙에 인재(仁齋)

라는 강희안의 호 도장이 있어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나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다.


강희안이 활동하던 조선 초기에는 안견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중국 북송대의

이곽파(李郭派) 화풍의 그림을 즐겨 그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와는 달리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절파 화풍의 구도를 여실히 보여주며, 엎드린 인물의 모습이 1679년에

만들어진 중국 화보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의 인물 모습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강희안은 중국에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개자원화전》의 모본이 되었던

중국의 그림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어서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나 진위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분방한 붓질과 구도 등 뛰어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수도(山水圖)


조선 15세기. 52.5/ 96.5Cm.
도쿄국립박물관

 

 

독조도(獨釣圖)

조선 15세기. 86/ 132Cm.
 도쿄국립박물관

 




조어산수(釣魚山水)

 

최북은 여러 분야의 소재에 두루 능하였으며 전래된 작품도 적지 않다. 비교적 섬세하게

그린 실경산수는 당시의 화풍을 대변하며, 사의적(寫意的)인 산수는 활달한 필치로

두드러진 개성이 보인다. 조어산수는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리었던 최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담하고 거친 필치, 빠른 속도로 그린 간일한 구성, 담청 황색의 대조적인

설채(設彩) 등 중국에 있어서도 양주팔괴(揚州八怪)에 비견되는 그림이다. 화원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에 방불한 격조와 의취가 담긴 수작(秀作)을 남긴 최북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인(藝人)의 긍지를 지니고 그림에 임했던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부분도

 

족자 종이에 담채 66.3*42.9cm 서울 개인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