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03 04:00
어쩌면 조금 늦게 도착한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탐매(探梅). 예로부터 선비들은 봄의 길목에서 매화 구경 풍류를 즐겼다던가. 하지만 지금은 봄의 길목이 아니라 봄의 중턱. 때 이른 봄 더위로 서울 여의도마저 벚꽃 만발인데, 이제 와서 매화라니.
- '봄의 전령사' 매화와 벚꽃의 구분법
- 매화 : 나무 줄기를 따라 한 송이씩 핀다.
벚꽃 : 여러 개의 꽃들이 한데 모여 부케처럼 핀다. - 매화 : 줄기에서 바로 꽃이 핀다.
벚꽃 : 꽃 줄기가 길게 늘어지고 갈대처럼 처진다. - 매화 : 열매는 매실로 불리며 초록색을 띤다.
벚꽃 : 열매는 버찌로 불리며 붉은색을 띤다. - 매화 : 2월 하순 ~ 3월 하순까지 핀다.
벚꽃 : 3월 하순 ~ 4월 중순까지 핀다. - 출처 : 기상청 블로그
선암사 운수암 가는 담길에 백매 홍매 50여 그루가 어울려 피었다. 부처님 미소처럼 환한 웃음이다.
매화는 망울졌을 때, 만개했을 때, 그리고 낙화할 때, 이렇게 세 번은 봐야 한다던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봄꽃이 핀 3월의 마지막 주말, 남도를 향해 떠났다. 우리나라에 단 4주밖에 없다는 천연기념물 매화가 드디어 꽃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그리고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천연기념물 매화 중에서 유일하게 홍매인 백양사 고불매는 그 시점에서 아직 울음을 터트리기 전이었다. 일부는 활짝 피었지만 다른 가지에는 꽃망울이 눈물처럼 방울방울. 화엄매와 선암매도 아직 만개(滿開)까지는 조금 남은 시점이었다.
남도 고찰 선암·화엄·백양사의 山中 매화
선암사 승범 스님은 "일찍 피고 화려한 일본 매화와 달리, 한국 토종 매화는 늦게 피는 대신 향이 깊다"고 했다. 이르면 2월에도 꽃을 피우는 전국의 이름난 매화 마을보다, 산사의 고졸(古拙)한 매화가 지각 개화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산중이라 상대적으로 봄을 늦게 만나는 까닭도 있다. 강릉 율곡매를 제외하고, 선암매 화엄매 고불매는 각각 조계산 지리산 백암산의 자식이다. 서울보다 평균 5도는 더 낮은 곳에서 태어난 산중 매화다.
많게는 600년의 나이를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선암사 선암매. 탐매로 이름난 남도의 소설가 문순태는 "꽃이 피고 진 600년의 아득한 시간은 소멸이 아니고 깨달음이었으리라"고 쓴 적이 있다. 원통전 오른쪽 길, 운수암 가는 길에 피어난 홍매와 백매가 아득하다. 그 길 가득한 600년의 깨달음을 깊은 호흡으로 들이마신다. 매화는 마음으로 보고 귀로 듣는 꽃이라고 했다던가.
선비들은 매화꽃 한 송이를 복사꽃 일만 송이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고려시대 학자 이인로(1152~1220)의 매화시편 한 구절이다. '고야산 신선 고운 살결에 눈으로 옷 지어 입고/ 향기로운 입술로 새벽 이슬에 구슬을 마시는구나/ 속된 꽃술이 봄철 붉은 꽃에 물드는 것 싫어서/ 신선이 사는 요대 향해 학 타고 날아가려 하는구나'
선암사 원통전 담장 너머로 아직 머리두건을 쓰지 않은 젊은 예비 수녀가 사진을 찍는 중이다. 하얗게 핀 매화 그 이상으로 환한 얼굴들이다. 매화가 빚어낸 종교 간의 대화. 꽃절로 이름난 선암사는 이미 탐매가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를 찾아온 객들로 넘쳐난다. 600년 된 매화와 비슷한 시기에 심었다는 와송(臥松), 이미 고개를 뚝뚝 떨군 동백, 아직 자태를 뽐내지 않는 영산홍, 자산홍, 왕벚꽃, 처진 올벚나무….
탐매를 떠나기 전, 서울의 한 샐러리맨 친구는 이렇게 투덜거렸다. "바빠 죽겠는데, 왜 꽃들은 피고 난리라니." 마침 옆자리에 있던 한문학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 문장은 한 편의 시군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마저도 거부하기 힘든 유혹, 봄꽃 기행. 사실 천연기념물로 한정했지만, 그 4주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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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은 천지 사방이 꽃이다. 탐매로 한정한다면, 4월 3일에야 당신 앞에 도착할 이 편지는 실패한 프러포즈가 될지도 모른다. 어떤 절에서는 이미 매화가 절정을 넘어 난분분 난분분 낙화를 마쳤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이번 주말은 동서남북 사방팔방이 꽃이리라. 천년 고찰뿐만 아니라 서울 구석구석까지.
선암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뒤편 편백나무 숲으로 향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숲 속. 해를 등지고 선 목련이 단 한 송이도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수줍은 봉오리를 물고 있었다. 이번 주말, 당신이 와주신다면, 그때 환하게 웃으며 피어날 수도 있겠지. 편지를 서랍에 넣어둘지, 봉투를 뜯을지 결정 여부는 결국 당신의 몫이다.
탐매(探梅)는 곧 산사 체험이기도 하다. 꽃이 피고 지는 순간을 인간이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 율곡매는 이미 낙화를 마쳤다. 그러니 혹여 이번 주말 매화 꽃잎이 떨어졌다면, 순서대로 피었을 봄꽃과 천년 고찰을 즐길 일이다. 어느 절집이나 진입로 몇㎞ 구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천천히 걸으면서 감상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것을 추천한다. 선암사와 화엄사, 그리고 백양사다.
순천 선암사 - 바랜 대로 닳은 대로 그 모습 아름답네
절 앞의, 무지개 모양 아치형 돌다리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를 먼저 건널 것.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간다. 우리나라 절집이 빚어낸 최고 풍경 중 하나다.
30여개 전각(殿閣)으로 꾸민 선암사는 1500년 세월을 오롯이 품은 조계산의 고찰. 미술사가 유홍준은 제 마음속 문화유산으로 한글·청자·산사를, 그중 산사의 대표로는 선암사를 꼽은 바 있다. 계단식 가람 배치다. 만세루에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드러나고, 다시 한 계단을 오르면 팔상전, 여기서 또 한 계단을 오르면 원통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매화는 원통전 담장 뒤편에 있다. 그 오른쪽, 운수암 가는 담길에 백매 홍매가 어울려 피었다. 한국 토종 매화나무 50여그루가 부처님 미소처럼 환하다.
꽃절 선암사는 여름까지 꽃이 지지 않는다. 3월 마지막 주말은 홍매, 백매와 목련, 그리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동백의 계절이었다. 이제 곧 영산홍, 자산홍, 처진올벚나무가 자신의 계절을 선언할 것이다. 그다음이면 모란꽃도 만개하겠지. 무량수각 앞에 길게 누운 650년 된 소나무, 칠전 차밭의 700년 넘은 차나무도 모두 선암사의 주인이다.
단청은 바랬지만 바랜 대로, 나뭇결은 닳았지만 닳은 대로 아름다웠다. 아쉬운 것은 사찰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는 점. 뒷간으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 해우소도 보수 중이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는 그 뒷간이다.
원통전의 소박한 모란꽃살문도 잊지 말고 보고 올 것.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으로, 선암사 원통전에는 조선 순조가 직접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365일 템플스테이가 가능하다. 1박 2일 4만원부터.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 종무소 (061)754-5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