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엔푸에고스(Cienfuegos)가 파란색의 도시라면, 비냘레스(Vinales)는 녹색의 도시다. 비냘레스는 초록빛 자연에서 여유를 누리고 힐링을 경험해야 한다. 비냘레스에서 맞는 아침은 정겹다. 이른 아침, 재잘재잘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 문을 열면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밭으로 나간다. 여행자도 일찌감치 자전거를 끌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내 고향, 경북 봉화에서 맞는 아침도 비슷했다. 아버지는 지게에 쟁기를 얹고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갔다. 문을 열면 아침 해를 받은 거름 자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곤 했었다. 비냘레스가 고향처럼 포근하게 느껴진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쿠바의 평온한 시골 풍경
비냘레스는 아바나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 떨어진,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농촌 지역이다. 자동차가 아바나 도심을 벗어나자 길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할 때마다 풍경도 달라졌다. 금세 도착할 듯했는데 제법 오래 걸렸다. 푸른 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회색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석회암이었다. 세월의 흐름 대로 그 형태는 제각각이었다.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고 지나가자 선명하게 단장한 비냘레스가 나타났다. 여행자들은 다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고 자동차는 그들의 흐름에 맞춰 서두르지 않고 지나갔다. 왕복 4차선 도로가 마을을 가로지르고 도로를 중심으로 가게와 까사(민박집)가 늘어서 있다. 붉은 지붕에 알록달록 색을 칠한 집은 모두 똑같이 닮았다. 문패와 번지수가 없다면 찾지도 못할 판이다. 시내를 둘러보는 건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비냘레스는 시가의 재료인 담뱃잎 재배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시가는 쿠바에서도 인정받은 품질 좋은 시가다. 마침 밭에선 어린 담뱃잎이 마음껏 햇살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비와 바람과 햇살이 만든 곳
비냘레스 마을이 있는 비냘레스 계곡은 1999년 쿠바 정부가 ‘국가 기념물’이자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같은 해 유네스코는 비냘레스 계곡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다.
비냘레스에서는 모고떼(Mogote)라 부르는 독특한 모양의 언덕이 유명하다. 모고떼는 석회암 덩어리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용식작용에 의해 생긴 독특한 지형이다. 그 모양이 제주의 오름과 흡사하다. 몽실몽실한 언덕에는 날카롭게 깎여나간 곳도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붉은 흙, 쭉쭉 뻗은 야자수 그리고 모고떼가 만든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비냘레스에서는 석회암 동굴 탐험, 암벽 등반, 카노페(Canope)라 부르는 짚라인(Zipline) 등 다채로운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다. 5페소(약 6000원)만 있으면, 승하차 제한이 없는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 딱히 들를 만한 박물관도 없고 꼭 들려야 할 특별한 곳도 없지만 비냘레스에서 보내는 시간은 마냥 행복하다. 넉넉한 자연의 품이 여행자를 한없이 여유롭게 안아주기 때문이다.
비냘레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고향 같은 풍경으로 남아 있을 줄 알았던 비냘레스가 변하고 있다. 외국인의 입맛과 취향에 맞춘 레스토랑과 바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마을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현대식으로 꾸민 인테리어, 세련된 음식 플레이팅, 젊고 잘생긴 웨이터의 쿠바답지 않은 서비스. 레스토랑이나 바에 앉아 있다 보면, 이곳이 정말 쿠바인가 하는 곳이 제법 늘었다.
‘라 꾸엔카(La Cuenca)’도 대표적인 최신식 레스토랑이다. 흑백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인 인테리어에 최신식 개방형 주방까지 갖추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바텐더도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바나 클럽 럼이 들어간 칵테일을 석 잔이나 마셨다. 톡 쏘고 달콤, 상큼한 맛이 익숙한 맛이었다.
혹자는 비냘레스의 변화를 염려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언젠가 이 거리가 모두 변해 쿠바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어진다 해도 마을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마을 풍경이 변치 않기를, 또 마을 사람들이 전통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건 여행자의 이기심일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바람은 있다. 비냘레스 담뱃잎으로 만든 시가의 맛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