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겉은 '바삭' 속은 '폭신'… 달고 향기로운 술에 적셔 한 입
입력 : 2017.07.07 04:00
[정동현 셰프의 생각하는 식탁] 영국에서 먹은 '마들렌'의 추억

일종의 작별 인사였다. 영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정찬은 기다려지면서도 또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6년 전 늦여름, 요리 학교의 모든 수업은 끝이 났다. 영국의 경기도쯤 되는 서리(Surrey)주, 교외의 한 펍(pub)에서 학교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맥주를 마시며 오후 한때를 보낸 것이 졸업식의 마지막 순서였다. 그다음 날, 이삿짐을 싣고 런던으로 향하는 밴의 차창 너머로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무지막지하게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스쳐 지나갔다. 창을 내리자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푸른 내음이 몸을 감쌌다. 그 뻑뻑한 녹음의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꽃향기와 새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어. 잘됐다."
형은 나의 제안을 단번에 승낙했다. 이미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형이었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 점심, 우리는 꽃향기도, 새소리도 없는 스미스필드(Smithfield) 마켓의 세인트 존(St. John)이라는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스미스필드 마켓은 한국의 마장동 같은 곳이다. 10세기경부터 가축 시장이 열리기 시작해 지금처럼 육류 시장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것은 19세기 무렵이라고 했다. 그 스미스필드에 자리 잡은 세인트 존은 요리사들이 일을 마치고 허기를 달래며 찾는 레스토랑으로 유명했다. 프랑스풍의 짙은 소스가 아닌 묽으면서도 단순하고 정감 있는 영국풍 요리가 이어졌다. 바삭하게 오븐에 구운 돼지껍질과 돼지 뼈 골수 구이, 메추라기 구이 등을 먹었다. 배가 부를 무렵 매니저가 다가왔다. 디저트 시간이었다.
"이건 정말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우리 레스토랑에 오면 꼭 먹어야 해요."
대머리에 짙은 눈썹을 한 매니저는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메뉴는 마들렌(Madeleine)이었다. 프랑스 북동부의 전통 케이크인 마들렌은 어쩌면 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식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읽은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프루스트의 길고 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으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하는 이 작용은 실제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맛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냄새는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그리하여 후각을 상실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도 많은 부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소설 속 추억의 방아쇠가 된 마들렌은 만들기 복잡한 어려운 음식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러하듯 일요일 아침 집에서 구워 먹는 작은 간식에 가깝다. 필요한 재료도 '가정식'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무게의 설탕과 밀가루, 달걀, 버터를 준비한다. 설탕과 달걀을 섞고 하얗게 크림처럼 변할 때까지 거품기로 체를 친다. 그다음 밀가루를 섞고 베이킹파우더를 한 꼬집 정도 넣은 다음 녹여놓은 버터를 잘 섞는다. 그리고 취향에 따라 맛을 첨가한다.
가장 흔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맛은 바로 레몬이다. 레몬즙뿐만 아니라 레몬 겉껍질을 살짝 벗겨서 넣으면 향이 더 강하게 살아난다. 반죽이 끝나면 조개 형태로 모양을 낸 마들렌 전용 틀에 붓고 200도로 예열한 오븐에서 10분 정도 구우면 가운데가 빼꼼히 올라온 마들렌이 완성된다. 마들렌은 그 이후 상온에서 하루 이틀 정도 놔두고 먹어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당연히 오븐에서 갓 나왔을 때가 맛이 가장 좋다. 신선한 그 맛, 겉은 살짝 바삭거리고 속은 폭신히 김이 올라오는 마들렌, 꿈결에 맡았을 마들렌 향기에 이끌려 프루스트는 아마 그 긴 소설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마지막 정찬, 그날의 마들렌도 갓 구운 것이었다. 잠시 뒤 하얀 옷을 입은 요리사가 따끈한 마들렌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하지만 여기서 뭔가가 더 필요하죠."
매니저는 윙크하며 술병 몇 개를 가지고 왔다. 프랑스 소테른 지방에서 나는 스위트 와인, 카리브해 연안의 럼, 그리고 코냑이었다. 프루스트는 홍차에 마들렌을 찍어 먹었지만 우리는 달고 향기로운 술에 마들렌을 적셨다. 알코올의 열기와 오븐의 불기가 채 식지 않은 마들렌이 뒤섞였다. 입속에서 작은 폭풍이 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을 타고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익어간 레몬의 향이 흩어졌다. 마들렌의 골조가 녹아내리며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갔다. 숨을 내쉴 때 향이 코로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무너져 내린 옛 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유 없이 슬픔이 몰려왔다. 다시는 똑같은 맛의 마들렌을 먹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 순간을 몸에 품고 오랫동안 잊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바로 지금까지.
■에뜨왈(070-7627-0057):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작은 가게다. 갓 구운 것은 아니지만 레몬 향이 확연한 이곳의 마들렌을 먹으면 영국에서의 기억이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어. 잘됐다."
형은 나의 제안을 단번에 승낙했다. 이미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형이었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 점심, 우리는 꽃향기도, 새소리도 없는 스미스필드(Smithfield) 마켓의 세인트 존(St. John)이라는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스미스필드 마켓은 한국의 마장동 같은 곳이다. 10세기경부터 가축 시장이 열리기 시작해 지금처럼 육류 시장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것은 19세기 무렵이라고 했다. 그 스미스필드에 자리 잡은 세인트 존은 요리사들이 일을 마치고 허기를 달래며 찾는 레스토랑으로 유명했다. 프랑스풍의 짙은 소스가 아닌 묽으면서도 단순하고 정감 있는 영국풍 요리가 이어졌다. 바삭하게 오븐에 구운 돼지껍질과 돼지 뼈 골수 구이, 메추라기 구이 등을 먹었다. 배가 부를 무렵 매니저가 다가왔다. 디저트 시간이었다.
"이건 정말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우리 레스토랑에 오면 꼭 먹어야 해요."
대머리에 짙은 눈썹을 한 매니저는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메뉴는 마들렌(Madeleine)이었다. 프랑스 북동부의 전통 케이크인 마들렌은 어쩌면 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식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읽은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프루스트의 길고 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으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하는 이 작용은 실제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맛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냄새는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그리하여 후각을 상실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도 많은 부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소설 속 추억의 방아쇠가 된 마들렌은 만들기 복잡한 어려운 음식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러하듯 일요일 아침 집에서 구워 먹는 작은 간식에 가깝다. 필요한 재료도 '가정식'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무게의 설탕과 밀가루, 달걀, 버터를 준비한다. 설탕과 달걀을 섞고 하얗게 크림처럼 변할 때까지 거품기로 체를 친다. 그다음 밀가루를 섞고 베이킹파우더를 한 꼬집 정도 넣은 다음 녹여놓은 버터를 잘 섞는다. 그리고 취향에 따라 맛을 첨가한다.
가장 흔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맛은 바로 레몬이다. 레몬즙뿐만 아니라 레몬 겉껍질을 살짝 벗겨서 넣으면 향이 더 강하게 살아난다. 반죽이 끝나면 조개 형태로 모양을 낸 마들렌 전용 틀에 붓고 200도로 예열한 오븐에서 10분 정도 구우면 가운데가 빼꼼히 올라온 마들렌이 완성된다. 마들렌은 그 이후 상온에서 하루 이틀 정도 놔두고 먹어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당연히 오븐에서 갓 나왔을 때가 맛이 가장 좋다. 신선한 그 맛, 겉은 살짝 바삭거리고 속은 폭신히 김이 올라오는 마들렌, 꿈결에 맡았을 마들렌 향기에 이끌려 프루스트는 아마 그 긴 소설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마지막 정찬, 그날의 마들렌도 갓 구운 것이었다. 잠시 뒤 하얀 옷을 입은 요리사가 따끈한 마들렌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하지만 여기서 뭔가가 더 필요하죠."
매니저는 윙크하며 술병 몇 개를 가지고 왔다. 프랑스 소테른 지방에서 나는 스위트 와인, 카리브해 연안의 럼, 그리고 코냑이었다. 프루스트는 홍차에 마들렌을 찍어 먹었지만 우리는 달고 향기로운 술에 마들렌을 적셨다. 알코올의 열기와 오븐의 불기가 채 식지 않은 마들렌이 뒤섞였다. 입속에서 작은 폭풍이 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을 타고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익어간 레몬의 향이 흩어졌다. 마들렌의 골조가 녹아내리며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갔다. 숨을 내쉴 때 향이 코로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무너져 내린 옛 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유 없이 슬픔이 몰려왔다. 다시는 똑같은 맛의 마들렌을 먹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 순간을 몸에 품고 오랫동안 잊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바로 지금까지.
■에뜨왈(070-7627-0057):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작은 가게다. 갓 구운 것은 아니지만 레몬 향이 확연한 이곳의 마들렌을 먹으면 영국에서의 기억이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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