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 녹턴 20번 (바이올린 장영주) Chopin / Nocturne No.20 Frédéric Chopin 1810-1849
비롯한 수많은 미디어에서 사랑받고 있는 곡이다. Op.15-3은 1830년부터 33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서 단순한 살롱풍의 음악을 뛰어넘는 깊이감과 세련미를 자랑한다. 특히 2번의 형식적인 불균형함과 3번의 왈츠풍의 3박자는 기존의 통념적인 녹턴에서 벗어나고 있는 쇼팽의 독창성을 대변해 준다.
'야상곡'이라는 뜻의 녹턴(Nocturne)은 아일랜드의 존 필드(John Field,1782-1837)가 고안한 피아노 소품 양식으로 뚜렷한 형식은 없고 주로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된 작품을 말한다. 한 밤의 정취를 담아 대부분 부드럽고 감상적인 서정적 선율이 흐르지만 웅장하고 극적인 작품도 있다.
녹턴하면 흔히 프레데리크 쇼팽을 떠올리지만, 필드가 작곡한 20곡 가까운 녹턴은 쇼팽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또 쇼팽에 의해서 정교하고 세련된 피아노 소품으로 완성되었다. 필드의 작품은 쇼팽에 비해 간결하고 밝으며, 노래하듯이 흐르는 서정적인 선율이 무척 아름답다.
녹턴(야상곡)은 원래 존 필드가 창시한 것인데, 그가 1832년부터 33년까지 파리에 체재 중 쇼팽에게 그 영향을 주었고, 쇼팽에 의해 전혀 새로운 형식을 낳기로 이르렀다.
이 곡은, 작품9번 세 곡 · 작품15번 세 곡 · 작품27번 두 곡 · 작품32번 두 곡 · 작품37번 두 곡 · 작품48번 두 곡 · 작품55번 두 곡 · 작품62번 두 곡 · 작품72번 두 곡이 있다. 또한, 작품72번의 1인 e단조는 쇼팽이 죽은 뒤에 발견된 것이며, 실제는 소년 시절의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
제20번 c#단조 작품72번의 2(유작). 쇼팽의 사후 그의 유물 중에서 발견된 곡. 제19번의 작품72번과 마찬가지로, 쇼팽 청년기의 작품이며 1895년에 출판되었다. 바이올린용과 첼로용으로 편곡되어 있다.
Chopin, Nocturnes 피아노를 위한 녹턴은 원래 영국 작곡가인 존 필드(1782~1837)가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로부터 영향을 받아 창작한 음악장르다. 그는 1812년경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녹턴(몇 곡은 로망스로 이름붙여지기도 했다)을 작곡했고, 이후 약 18개의 녹턴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음악 장르는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의 벨칸토 오페라를 사랑했던 쇼팽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쇼팽은 청년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의 녹턴을 꾸준히 작곡했는데, 쇼팽의 녹턴은 특유의 자기성찰적인 측면으로 인해 19세기를 지배했던 외향적 비르투오소를 위한 음악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한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노트르노(Notturno) 형식과도 달랐고, 멘델스존에 의해 창안된 [무언가](Songs withoud Words)와도
다른 독특한 정서를 담고 있었다.
신비로운 감성을 담은 밤의 노래
1827년부터 1847년 사이에 작곡된 쇼팽의 19개의 녹턴은 형식에 있어서 존 필드의 그것을 거의 따르고 있다. 단순한 반주와 세련된 선율로 A-B-A’의 가곡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쇼팽은 존 필드의 형식을 그다지 많이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A 부분은 항상 멜로디컬하고 리드미컬한 오른손 선율이 지배적으로서 벨칸토적 장식음들이 도드라지며 성악적인 환상과 효과를 배가시킨다. B 부분은 A의 주제와는 다른, 보다 밀도가 높고 긴박한 표현력과 극적인 감수성을 요구한다. A’는 A에 대한 회귀로서 긴장감을 소멸시킴과 동시에 밤이라는 시간대 특유의 무감각함을 상징한다. Op.32-2, Op.72-1, Op.48-2, Op.55-1 등에서 형식적인 변화가 얼핏 보이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을 제외한다면 쇼팽의 다른 무곡들, 즉 마주르카나 왈츠에서 사용한 세도막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범한 주제와 치열한 발전, 구조적인 응집력을 요하는 전개와 제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나타 형식과 비교한다면, 무곡에 기반을 둔 세도막 형식은 간결하고 율동적이며 상징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쇼팽의 시적 상상력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롭고 신비로운 감정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녹턴은 그 길이가 짧은 만큼 듣는 이의 내면을 더욱 강렬하게 흔들어놓으며 낭만주의 시대 음악을 대표하는 최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렇듯 풍부한 상상력과 무언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녹턴은, 쇼팽 사후 가브리엘 포레를 비롯한 일군의 프랑스 작곡가들, 더 나아가 러시아의 스크리아빈이나 보로딘에게도 영향을 준다.
녹턴 연주사에 있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쇼팽의 제자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쇼팽 스페셜리스트인 피아니스트 칼 미쿨리의 제자들, 즉 모리츠 로젠탈이나 라울 콕찰스키의 연주를 들어보면 현대에는 기피하는 즉흥적인 장식음을 추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절대로 같은 곡을 같은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았다는 쇼팽의 음악 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은 쇼팽의 후기보다는 전기 작품 연주에 이런 연주법을 적절히 용했다. 물론 템포 루바토와 양손을 어긋나게 연주하여 낭만적인
정취를 고조시키는 연주법 또한 적극 사용하여 녹턴의 서정성과 고급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쇼팽의 녹턴을 통해 밤이 가진 고요함과 고즈넉함에 시적 상상력을 극대화했다> 시적 감수성으로 세련된 깊이에 도달하다
<밤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그려낸 녹턴> 보통 녹턴 20번으로 불리는 유작 녹턴 C샤프 단조는 쇼팽이 청년기 시절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진 곡으로 1895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그 독특한 아름다움과 섬세한 분위기가 듣는 이를 압도하는 이 곡은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사용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는 녹턴이다. 그러나 정작 왼손과 오른손의 다른 박자에서 기인하는 어려움과 유명세로 인해 바이올린 소품으로도 편곡되어 자주 연주되기도 한다. 오랜동안 잊혀져 있던 녹턴 21번 역시 유작으로서 1938년 바르샤바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작곡연대는 1830년 혹은 25년이나 27년 등등 이견이 분분하다.
녹턴은 낭만 예술의 위대한 장르들 중의 하나를 표현한다. 쇼팽은 존 필드에게서 그 장르의 기원을 이어받았고 존 필드의 매력적인 순박함을 쇼팽의 천재성으로 없애는 데 전진했다. 존 필드가 쇼팽의 첫 번의 세 개의 녹턴을 들은 후 쇼팽의 재능은 별볼일 없다고 하였다. 쇼팽의 유혹은 19 세기의 무수히 많은 작곡가들을 매혹시켰다. 그리고 곧 쇼팽의 음악은 매우 판에 박힌 듯 되풀이 되어 Moscheles 가 "" 우리가 이 병적이게 우울한 그리고 과장되게 장식된 모든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나요? ... 어떤 작곡가가 나에게 불안하게 씌여진 녹턴집을 가져왔어요. 그리고 그것은 나의 녹턴의 심상을 위혐했습니다. " 라고 말하게 되었다.
쇼팽이 그의 음악들로 순간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녹턴집은 그의 정취있는 작품들에서 그는 그의 무한한 멜로디의 재능의 힘이 흐르도록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세에 까지 놀라울 따름이다. Henry T.Finck 는 " 멘델스존의 A Midsummer Night's Dream 는 우리에게 환상의 세계에 단상을 보여주었지만., 쇼팽의 녹턴은 우리를 환상의 세계로 움직이게 한다. " 라고 하였다.
야상곡이 쇼팽 작품 가운데에서 전주곡과 연습곡이 차지하는 것과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은 결코 보잘 것 없는 작품들이 아니다. 마주르카에서처럼 그는 여기에서도 피아니스트적관심사에는 주의를 덜 기울였고, 자신의 가장 은밀한 상념과 감정에 더 주의를 쏟았음을 우리는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쇼팽의 가장 특유한 연주 스타일로부터 크게 유래했음이 분명한데, 그의 스타일에 관한 당시의 기록들은 그가 칸타빌레 구절에서 얻어낼 수 있었던 음악이 지닌 고도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한결같이 강조한다. 이들 기록은 모두 그가 놀라운 명기교적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그러나 가장 인상을 준 것은 언제나 바로 그의 연주의 시정성 (詩情性)이었다.
사실 야상곡은 너무 은밀하여서 큰 연주회장에는 적합하지 못하며, 보다 제한된 수의 관중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야상곡은 피아노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느낌과 상통하는 것으로 , 그 이전에는 이런 느낌을 집중적으로 모색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악기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이것이 지닌 강력한 소리와 타악기적 가능성을 최대로 이용하려는 입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