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잘못된 소신(所信)도 나라를 망친다 〈2〉 케임브리지 5인방

산야초 2018. 5. 17. 21:54

잘못된 소신(所信)도 나라를 망친다 〈2〉 케임브리지 5인방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 때문에 소련 간첩이 된 ‘이념형 간첩’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명문가 출신 케임브리지 졸업생들, 1930년대 대공황 속에서 ‘세계 혁명’ 위해 소련 돕자며 KGB의 간첩 돼
⊙ 킴 필비, MI6의 대소공작 책임자로 소련·동구 국가에 대한 특수요원 침투 등 지휘… 미국 CIA 창설 초기에 자문
⊙ 매크린, 6·25 당시 미국의 제한전(制限戰) 방침 소련에 알려 중공군 투입 여건 제공
⊙ 블런트, “반파시즘 투쟁이었다”고 강변… 공산혁명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386세대’와 흡사
         
  간첩, 스파이, 세작, 첩보원, 공작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직업은 창녀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한다.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트 3세는 밀가루 포대 사이에 간첩을 숨겨서 포위 중이던 도시를 염탐했다. 모세도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땅을 살피러’ 간첩들을 들여보냈다. 간첩을 움직이는 힘은 세 가지 중 하나라고 한다. 돈, 모험심, 이념. 이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실적이 좋은 간첩은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다. ‘케임브리지 5인방(Cambridge five)’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케임브리지 5인방’은 냉전(冷戰) 시대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 간첩 5명을 말한다. 킴 필비, 가이 버제스, 도널드 매클린, 앤서니 블런트, 존 케른크로스가 그들이다. 이들이 소련에 제공한 정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소(獨蘇)전쟁의 승패를 갈랐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국가들의 운명을 좌우했다. 6・25 당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도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 상태인 것도 상당 부분 이들의 탓이다.
 
 
  출신성분
 
  명문가 출신 엘리트들
 
  이들은 케른크로스만 빼놓으면 모두 떠들썩한 집안 태생이었다. ‘킴 필비’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해럴드 필비(1912~1988)의 아버지 해리 필비는 20세기 초 중동을 무대로 활동한 영국 첩보원이었다. 해리 필비 역시 케임브리지 출신이었다. 그는 토머스 E. 로렌스처럼 아랍 해방의 대의(大義)에 공명(共鳴)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창건자인 이븐 사우드 국왕과 절친한 친구였다. 해리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아내와 이혼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했다. ‘해리 필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후일 영국 정보기관 내에서 킴 필비가 출세하는 데 든든한 배경이 됐다. ‘킴 필비’의 ‘킴’은 인도를 배경으로 한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킴》에서 따온 것이다. 해리 필비는 아들이 인도 태생인 데다가 키플링 소설의 주인공처럼 고집이 세다고 해서 그런 별명을 붙였다.
 
  가이 버제스(1911~1963)는 대대로 육군과 해군의 장성들을 배출해 온 명문가 출신이었다. 앤서니 블런트(1907~1983)의 아버지는 영국성공회의 성직자였다. 어머니는 조지 6세의 장인인 스트래트모어 백작의 사촌 누이였다.
 
  도널드 매클린(1913~1983)의 아버지 도널드 매클린 경(卿)은 변호사 출신 정치인으로 램지 맥도널드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아버지는 바쁜 정치생활 때문에 자식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반항심을 품게 됐고, 이는 다시 기성체제에 대한 반항심으로 이어졌다.
 
 
  동성애로 엮인 사이
 
  가이 버제스와 앤서니 블런트는 애인 사이였다. 즉 두 사람은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킴 필비, 도널드 매클린, 존 케른크로스도 이들과 동성애 관계로 엮여 있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동성애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성적(性的) 소수자로 모는 기성세대에 적대감을 가지고 이를 파괴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존 케른크로스(1913~1995)는 앞의 네 사람과는 달리 스코틀랜드의 중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잘해서 케임브리지로 진학했고, 프랑스 소르본대학에 유학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케임브리지 안에서도 상류계급 출신들은 자기들끼리만 뭉쳤다. 출세도 인맥이 좋은 그들에게만 보장되어 있었다. 케른크로스 자신도 사교성이 부족했다. 후일 ‘케임브리지 5인방’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케른크로스는 다른 네 명과는 친분이 별로 없었다. 이런 환경이 그를 공산주의로 내몰았다.
 
 
  좌경화
 
  ‘케임브리지의 리영희’ 모리스 도브
 
  이들이 대학을 다니던 1930년대는 대공황 시대였다. 서구(西歐) 자본주의 사회는 그 모순이 극에 달한 끝에 끝장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는 여전히 부(富)와 신분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철저하게 나누어진 ‘양극화(兩極化)’된 사회였다. 젊은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더없이 부조리해 보였다. 다른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대두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무너뜨리고 파시즘과 싸울 수 있는 대안(代案)을 모색했다. 그때 그들의 눈에 공산주의 소련이 들어왔다. 당시 소련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다. 소련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미래이자,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것처럼 보였다(스탈린 체제 아래서의 폭압과 학살은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대 ‘386세대’가 군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론과 혁명무력을 북한에서 구했던 것과 비슷하다. 케임브리지 5인방도 마찬가지였다.
 
  후일 국내 방첩기관인 MI5의 조사를 받을 때 앤서니 블런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1930년대를 이해하지 못하네.”
 
  케임브리지에는 모리스 도브라는 경제학 교수가 있었다. 그는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당원증을 받은 최초의 영국 지식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민하는 제자들을 좌경화(左傾化)시켰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리영희’ 같은 존재였다.
 
  영국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대학에는 소수 엘리트들만의 사교클럽이 있다. 케임브리지에는 ‘케임브리지 사도회’라는 것이 있다. 킴 필비는 여기서 앤서니 블런트, 가이 버제스를 알게 됐다.
 
 
  애인에게 의식화된 킴 필비와 앤서니 블런트
 
공산주의를 탄압한 오스트리아의 독재자 엥겔베르트 돌푸스.
  대학을 졸업한 후 킴 필비는 장차 반(反)파시즘 투쟁을 위해서는 독일을 알고 독일어를 익혀야겠다는 생각에서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여기서 그는 알리체 콜먼이라는 처녀를 알게 됐다. ‘리치’라고 불리던 그녀는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이 리치가 킴 필비를 빨갛게 물들인 장본인이었다. 리치는 킴 필비의 첫 번째 아내가 됐다. 리치는 코민테른의 공작원 아널드 도이치를 킴 필비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때부터 킴 필비는 소련 정보기관과 선이 닿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돌푸스 정권의 무자비한 공산주의 탄압도 킴 필비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그는 공산주의야말로 자본주의를 쳐부술 수 있는 상대라고 믿게 됐다. 1934년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킴 필비는 가이 버제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면서 망원(網員)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파시즘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소련뿐이라면서, 파시즘을 막고 세계 혁명을 위해서는 모든 역량을 다 기울여 소련을 도와야 한다고 결심했다.
 
  가이 버제스도 킴 필비 못지않은 활동가였다. 그는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대학 시절 대학 사무직원이나 시내버스 운전사, 거리청소원들의 처우 개선 요구 시위에 적극 나섰다
 
  이들에 비하면 앤서니 블런트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동조자’에 가까웠다. 가이 버제스는 블런트를 온전한 공산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무척 노력했으나, 블런트는 잘 따라가지 않았다. 다만 블런트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버제스에 대한 애정 때문에 간첩이 됐다. 블런트는 자기에게 불문학을 배운 존 케른크로스를 버제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케른크로스가 소련 간첩이 된 것은 영국 공산당 계통을 통해서였다.
 
 
  위장전향
 
  버제스, “나는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킴 필비나 가이 버제스는 한때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상류사회를 떠나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꿈을 꾸었다. 1970~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공활(工活)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소련 KGB(당시는 NKVD[내무인민위원부]였고 후일 KGB[국가보안위원회]로 개칭하지만 여기서는 KGB로 통일함)는 이들에게 정부기관으로의 진출을 요구했다. 소련 정보기관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기다릴 줄도 알았다. 1970년대 김일성이 똑똑한 학생들을 후원해서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을 통해 정부에 진출할 수 있게 하라고 교시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들이 정부기관에 들어가려 하자 대학시절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게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필비는 정부기관에 입사하려다가 좌절하자 주위 사람들에게 “내 생각에 공산주의 이론은 이미 죽었다”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영국 정보기관 및 상류사회에 인맥이 많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이력 세탁’에 도움이 됐다. 아버지 덕분에 그는 《타임스》의 특파원이 되어 내전이 벌어진 스페인으로 갈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프랑코 측 요인들과 사귀면서 ‘극우(極右)’로 변신할 수 있었다.
 
  소련 정보기관은 이들의 위장전향을 체계적으로 돕기도 했다. 소련 공작원 아널드 도이치는 가이 버제스, 앤서니 블런트 등 4명의 젊은이들의 소련 방문을 주선했다. 소련을 선전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욕하게 만들기 위한 여행이었다. 이들은 소련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소련의 실체를 보았다.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고 떠들었다. 버제스는 대학 시절 만났던 교수, 친구, 후배들에게 “나는 공산주의와 결별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게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이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 같은 이상향(理想鄕)이 아니며, 그곳에서의 삶의 질도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다. 앤서니 블런트 같은 경우 영국에서 귀족으로, 미술역사가로 자신이 누리는 영화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가 다시는 소련 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전형적인 강남좌파적 행태였다.
 
  이들의 사례는 입으로 전향했다고 말하는 이들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른바 386운동권 가운데도 전향한 사람들이 꽤 있다. 또 공개적으로 전향하지 않고 좌파 진영에 몸담고 있으면서 북한 체제나 좌파 진영의 문제점에 대해 제법 날 선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전향한 것인지를 알려면, 그들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인지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침투
 
  상류사회 인맥 통해 외무부·정보기관 입사
 
빅터 로스차일드는 귀족이자 유대인 금융거물의 가족이면서도 영국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했다.
  케임브리지 5인방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을 전후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영국 정보기관이나 외무부에 입사했다.
 
  가이 버제스는 대학 졸업 후 대학 친구인 빅터 로스차일드의 어머니의 투자자문비서가 됐다. 상류층에 막강한 인맥을 가진 로스차일드가의 비서라는 위치를 이용해 그는 MI6(영국 대외정보기관) 부장인 스튜어트 멘지스, MI5의 B과 과장인 딕 화이트 등 정보 분야 인사들과 사귈 수 있었다. 딕 화이트는 후일 MI6 부장이 된다. 1938년 버제스는 이런 인맥들에 힘입어 MI6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킴 필비는 1939년 MI6에 입사했다. MI6의 정보5과(방첩) 간부 중 한 명인 밸런타인 비비언은 킴 필비의 아버지 해리 필비의 옛 동료였다. 그는 킴 필비의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이 무렵 킴 필비는 MI5(국내정보기관)의 문서고에서 일하는 에일린 퍼스라는 아가씨와 사귀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지하운동을 하고 있던 리치와는 헤어진 지 오래였다. 에일린 덕분에 필비는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영국 공작원들과 관련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귀족인 앤서니 블런트도 로스차일드가를 통해 MI5 차장인 가이 리들, 딕 화이트를 소개받았다.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블런트도 MI5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널드 매클린은 1935년 외무부에 입사했다. 면접관들은 그에게 대학시절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데 대해 물었다. 매클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얼마 동안 저는 정말로 공산주의의 이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아직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미 저 자신은 분명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면접관들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에도 뒤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이런 식으로 운동권 경력을 얼버무리고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었다가 이후 정치권으로 진출한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케른크로스는 대학 졸업 후 외무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상류층 집안 자제들이 설치는 외무부 안에서 그가 설 땅은 없었다. 그는 얼마 후 재무부로 옮겼다.
 
 
  전쟁
 
  소련 간첩에게 간첩 감시기법 개발 맡긴 MI5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은 케임브리지 5인방을 당황하게 했다.
  1939년 8월 히틀러와 스탈린이 체결한 독소불가침조약은 ‘반파시즘 투쟁’을 명분으로 소련에 협조하고 있던 케임브리지 5인방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필비와 버제스, 블런트는 함께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독소불가침조약은 단지 평화적인 혁명으로 가는 길에 일어난 하나의 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하며, 현재 조성된 국제상황에서 이 조약이 소련과 관계를 단절해야 할 정도로 완전히 확신할 수 있는 핑곗거리는 아니므로 이 조약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의 ‘수령’인 스탈린이 자신들이 투쟁대상으로 삼고 있던 파시즘의 수괴 히틀러와 야합해서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을 나누어 먹었다는 현실은 외면했다. 인권유린, 핵무장, 3대 세습 등 온갖 부조리가 드러나도 한사코 북한을 감싸고도는 국내 좌파들의 행태와 흡사하다.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인해 생겼던 고민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특히 1941년 독소전쟁 개전으로 사라져 버렸다. 당초 ‘반파시즘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소련의 간첩이 된 ‘케임브리지 5인방’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앤서니 블런트는 국내 방첩기관인 MI5에 들어가자마자 스파이들을 미행하고 감시하는 기법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방첩요원들이 실제로 업무수행을 하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 개선방안을 내놓았다. 상관들은 대단히 흡족해 했다. 하지만 블런트에게 이에 관한 보고를 받은 것은 MI5의 상관들만이 아니었다. 영국에 있는 KGB도 블런트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덕분에 KGB 요원들은 영국방첩기관의 감시를 따돌릴 수 있게 됐다.
 
  MI5는 이어 블런트에게 당시 영국에 있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의 망명정부의 외교문서들을 훔쳐보는 임무를 맡겼다. 블런트가 입수한 정보들은 KGB로도 들어갔다. 이는 후일 소련이 전쟁 말기에 폴란드 등을 집어삼키는 데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블런트는 영국 방첩기관들의 정식 공작 일정표와 해외 주재 공작원들의 완전한 명단도 KGB에 넘겼다.
 
  인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딕 화이트는 미술사가인 블런트와 건축, 문학, 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업무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딕 화이트가 블런트에게 해주는 얘기들은 하나하나는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어 보여도 그것들을 조립하거나, 다른 곳에서 입수한 정보와 짜맞추어 보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매클린, 원폭개발 조정업무 맡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도널드 매클린은 미국과 영국의 원폭 개발 정책 조정에 참여했다.
  전쟁 초기 매클린은 외무부 총무국에 근무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 오가는 문서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유럽전쟁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정책, 미·영의 전후(戰後)정책, 영국이 특히 관심을 갖고 있던 폴란드 문제 등에 대한 기밀문서들이 그를 거쳐 소련으로 들어갔다. 스탈린은 미국·영국에 제2전선을 구축하라고 압박할 때나 종전을 앞두고 동구권을 강점할 때, 미국과 영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
 
  매클린은 1944년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 1등 서기관이 됐다. 전쟁 중 가장 견결한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의 전쟁정책이나 전후정책에 대한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게다가 당시 주미영국대사 핼리팩스 경은 매클린의 아버지와 친구로 매클린을 무척 신임했다. 덕분에 매클린은 극비문서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1945년 여름 매클린은 미영합동정책위원회에서 근무하면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와 영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튜브 엘로이스 프로젝트’를 조율하는 일에 참여했다. 미국은 당초 원자폭탄 개발에 필요한 이론연구 분야에서 영국보다 뒤처져 있었다. 때문에 초기에는 영국의 협력을 구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해결되자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이나 핵 정책에서 영국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매클린은 점점 더 반미적(反美的)이 되어 갔다.
 
 
  원폭 개발 계획을 제일 먼저 소련에 알린 케른크로스
 
독일과 소련의 기갑부대가 격돌한 쿠르스크 전투. 케른크로스는 독일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이 전투 승리에 기여했다.
  케른크로스는 전쟁이 일어나자 처칠의 측근인 행키 경의 비서가 됐다.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이었던 행키 경은 처칠 정부의 ‘리베로’였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처칠은 그를 불러 일을 맡겼다. 그는 정보기관이나 암호해독기관의 정비, 대외정책·군사·과학기술·산업 분야의 조정 등 손대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영국 정부의 모든 기밀문서가 행키 경 앞으로, 다시 말해 그의 비서인 케른크로스 앞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정보들이 그대로 KGB에게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미국과 영국이 합동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다는 정보를 소련에 제일 먼저 알린 사람도 케른크로스였다.
 
  1942년 케른크로스는 블레츨리파크에 있는 정부암호학교(GC&CS)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적국의 통신을 감청하고 암호를 해독하는 기관으로 소련이 공작원을 침투시키려 갈망하는 곳이었다. 케른크로스는 이곳에 있으면서 독일군의 신형 전차인 티거에 대한 정보, 독일군의 대소(對蘇)반격 작전인 치타델 작전 등에 관한 정보, 소련 점령지 내 공군기지에 있는 독일 공군비행부대의 명단 등을 입수, 소련에 제공했다. 이런 정보들은 독일과 소련의 기갑부대들이 격돌했던 사상 최대의 기갑전인 쿠르스크 전차전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냉전
 
  대소공작 책임자가 된 킴 필비
 
  나치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가고 있던 1944년, 영국의 대외정보기관인 MI6는 전쟁 후에는 소련이 주적(主敵)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 시작했다. MI6는 소련 내부를 교란하고 소련점령지, 위성국 내에서 테러, 전복작전을 수행할 ‘9과(課)’를 신설했다. MI6 내에서 많은 이가 이 자리를 노렸다. 킴 필비는 아버지의 친구인 밸런타인 비비언의 도움으로 9과 과장 자리를 차지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1945년 9월, 주터키소련대사관에서 영사 신분으로 활동하던 KGB 요원 콘스탄틴 불코프가 주이스탄불영국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해 왔다. 그는 영국 정부의 고위직에 있는 간첩 3명의 신원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게 ‘케임브리지 5인방’을 지칭하는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이에 대한 보고를 받은 필비는 스튜어트 멘지스 MI6 부장에게 경험 많은 요원을 이스탄불로 급파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필비가 이스탄불로 파견됐다. 현지 영국대사관 직원들이 관료적 타성에 젖어 굼뜨게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필비는 KGB에 손을 썼다. 불코프는 KGB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소련으로 끌려갔다.
 
  킴 필비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소련이 강제 합병한 발틱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지에 공작원들을 침투시키는 일을 맡았다. 당연히 그들 대부분은 침투하는 즉시 체포됐다. 그러면서도 KGB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자들의 침투는 일부러 눈감아 주거나, 체포한 후 포섭해서 역(逆)공작에 투입했다. 필비의 작전들 가운데 실패한 것은 잊히고 성공(?)한 것만 부각됐다. 필비는 MI6의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 동료들은 언젠가 그가 MI6 부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MI6 상층부는 장래 ‘부장 후보’에게 좋은 경력을 쌓아주기 위해 킴 필비에게 미국 CIA와 협력하는 일을 맡겨 워싱턴으로 파견했다. 원래 국가 차원의 정보기관이 없던 미국은 오랫동안 MI6라는 탁월한 대외정보기관을 운영해 온 영국의 노하우를 배우려고 했다. 킴 필비는 CIA 최고 지휘부와 어울리면서 영국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CIA의 조직도 등을 입수, 소련에 넘겨주었다.
 
  1949년과 1950년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알바니아에 무장병력을 침투시켜 엔베르 호자의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반군은 알바니아로 들어가는 족족 체포, 처형됐다. 킴 필비 때문이었다.
 
 
  NATO 관련 정보들도 소련 손으로 들어가
 
  가이 버제스는 1946년 애틀리 정부가 들어선 후 핵터 맥닐 외무부 제2장관(제1장관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노동당 당원이 임명됨)의 비서가 됐다. 핵터 맥닐은 일하는 것보다는 누리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버제스는 놀기 좋아하는 맥닐을 대신해 스스로 일을 떠맡았다. 당시는 전후 세계 질서 구축과 관련해 여러 가지 국제회의가 계속 열릴 때였다. 맥닐에게 올라오는 정보들은 고스란히 버제스의 손에 들어갔고, 다시 소련에 넘어갔다. 1946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4개국 외무장관(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회의에서 소련은 버제스 덕분에 독일, 유고슬라비아, 루르(독일-프랑스 국경의 탄광지대) 문제 등에 대한 다른 세 나라의 입장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존 케른크로스는 재무부로 돌아갔다. 그는 재무부에서 안보 관련 예산을 담당했다. 핵 개발에서 부대 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기 때문에 안보와 관련되는 온갖 정보가 케른크로스에게 들어왔다. 덕분에 소련은 그를 통해 영국의 핵 개발, 육·해·공군의 군비 확충,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등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NATO 창설 초부터 군의 지휘체계도, 미군 기지의 배치, 기지 내 민간인 근무자, 독일 내 핵무기 배치 계획이 소련에 넘어갔다. ‘케임브리지 5인방’을 담당했던 소련 공작관 유리 모딘은 “이 모든 것은 우리 군대에 횡재였다”고 술회했다.
 
  앤서니 블런트는 전쟁이 끝나면서 미술사학자라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는 영국 왕실의 미술품 수집·관리 담당자가 됐고, 기사(騎士) 작위도 받았다. 예술사 연구로 저명한 커톨드연구소장을 지내면서 예술사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권위자가 됐다. 그는 정보수집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필요할 때면 런던 주재 KGB 공작원과 도널드 매클런, 가이 버제스 등과의 연락을 맡았다.
 
 
  한국전쟁과 케임브리지 5인방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세계 정책을 주무르던 영국 외무부 내에서는 전후에 미국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데 대한 반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이 버제스는 공산화된 중국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시각 차이 등을 부풀려 이야기하면서 영국 외무부 내에서 반미감정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양국 간에 갈등이 쌓였다. 6·25 당시 영국은 미국이 자기들을 배제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을지, 그로 인해 유럽안보가 약화되지 않을지 노심초사(勞心焦思)했다. 영국은 미국이 강공을 펴지 못하도록 미국을 붙잡았다. 여기에는 버제스가 뿌려놓은 갈등의 씨앗도 한몫했을 것이다.
 
  매클린은 한국에 더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1948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소련의 팽창정책을 저지할 목적으로 B-29폭격기를 유럽에 배치했다. 미국은 이 폭격기들이 원자폭탄을 탑재한 것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1947년 영·미·캐나다핵정책조정사무국장으로 근무했던 매클린은 미국이 충분한 원자폭탄을 갖고 있지 못하며, 유럽에 배치된 폭격기에는 재래식 폭탄이 탑재됐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소련에 알려주었다. 스탈린은 뒷걱정 없이 동구권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스탈린은 극동에서 팽창정책을 펴더라도, 다시 말해 김일성을 사주해 남침을 하더라도 뒤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6·25 당시 영국 외무부 미국과장이던 매클린은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을 제한전(制限戰)으로 치르기로 했으며, 핵무기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만주를 침공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내 소련에 알려주었다. 소련으로부터 이 정보를 얻은 중국(중공)은 자신 있게 군대를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었다. 한국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은 것이다.
 
 
  종말
 
  탈출
 
소련에서 나온 킴 필비 기념우표.
  케임브리지 5인방이 이렇게 맹활약하는 사이에 미국은 ‘베노나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감청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방첩기관들이 꼬리를 밟다 보니 매클린이 걸렸다. 매클린과 버제스는 1951년 5월 소련으로 탈출했다. 킴 필비도 의심을 받고 MI6에서 축출됐다. 그는 MI5의 조사를 받았지만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 후 프리랜서 기자 등으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1963년 1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소련 선박을 타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앤서니 블런트와 존 케른크로스는 혐의를 인정하는 대신 처벌을 모면했다.
 
  소련은 그동안 자기들을 위해 헌신했던 매클린, 버제스, 필비를 나름 배려했다. 하지만 소련에서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대우는 좋았지만,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던 그들에게 소련 정부가 내준 거주지와 직장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영국에서 가족들이 이주해 왔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필비는 아내와 이혼하고 매클린의 아내를 가로챘다. 매클린과 버제스는 폭음을 일삼다가 죽었다. 망명한 마지막 멤버인 필비가 죽은 지 3년 후에 소련이 붕괴했다.
 
 
  블런트의 궤변
 
  앤서니 블런트가 ‘케임브리지 5인방’ 중 하나라는 소문은 계속 돌았다. 1979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블런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세계적인 예술사학자이자 영국 여왕의 친척이 소련 간첩이었다는 사실에 영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블런트는 기사 작위를 반납하고 미술사협회의 공식 지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술사협회는 그의 사임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명한 미술사가 스테인버그 교수는 앤서니 블런트가 미술사 분야에 기여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옹호했다.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윤이상을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떠받들면서 그의 잘못은 보지 않는 국내 예술계의 행태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런 분위기에 고무됐음인지 블런트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강변했다.
 
  “1930년대 중반에 이것은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반파시즘 투쟁을 하지 않는 것은 나라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기들은 ‘반역’을 한 게 아니라 ‘반파시즘 투쟁’을 했다는 궤변이었다.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한 공산주의 혁명 투쟁을 ‘민주화 투쟁’으로 포장하는 ‘386세대’와 흡사한 주장이다.
 
 
  이념 때문인가, 약점 때문인가
 
  ‘케임브리지 5인방’을 관리했던 소련 KGB 공작관 유리 모딘도 ‘케임브리지 5인방’에 대해 이렇게 옹호했다.
 
  “버제스는 단순히 소련만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세계 혁명을 위한 전위대로 보았다. 그가 우리와 협력한 이유는 순전히 이념 때문이었다. 나는 이것이 공작원의 특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이 버제스는 세계 혁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소련을 이러한 혁명의 요새로 생각했다.”
 
  “블런트는 소련의 정책과 자기의 의견이 일치해서가 아니라, 케임브리지 친구들과 같이 인류의 행복은 전 세계의 혁명이 있은 뒤에만 도달할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진실 때문에 우리와 협력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케임브리지 5인방’의 편에서 하는 얘기다. 그런 소리로 포장한다고 해서 ‘반역’이 ‘애국’이 될 수는 없다. ‘케임브리지 5인방’이 자기들 나름의 고결한 이상 때문이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약점을 잡혀 간첩 활동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공산주의 혁명 투쟁을 민주화 투쟁, 통일운동으로 포장해 온 자, 북한을 방문한 후 ‘섹스’ 문제로 약점을 잡혀 친북적(親北的)인 언동을 한다는 의심을 받는 인사들이 득실득실하고 있다. 그것이 ‘케임브리지 5인방’을 다시 생각해 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