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목선 57시간 우리 안마당 누벼… 軍警 경계망 3차례 뚫려
7년 전 '노크 귀순' 때와 다른 건 청와대가 의혹의 중심이란 점
경계를 태만히 해 전우 수백명이 죽을 뻔한 데 따른 징벌이었다. 하지만 전우들은 이에 대해 "받아야 할 처벌의 절반도 받지 않았다"고 불만스러워했다. 반면 미 언론 등 여론은 "가혹하다"는 분위기가 강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들은 석방됐다.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이 극찬했던 T R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 소개된 내용이다. 페렌바크는 이 책에서 미국이 얼마나 싸울 준비와 의지 없이 6·25전쟁에 참전했는지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페렌바크는 앞의 경계 실패 사례도 싸울 의지가 부족했던 한 예로 소개하고 있다.
◇노크 귀순 사건 vs 목선 입항 귀순 사건
최근 발생한 북한 목선의 삼척항 입항 귀순 사건도 명백한 경계 실패 사례다. 작은 배를 망망대해에서 탐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북 목선이 57시간 동안이나 우리 안마당을 누빌 동안 군경 3중 경계망에 잡히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번 사건은 지난 2012년 10월 최전방 철책선이 뚫려 파문을 일으켰던 이른바 '노크 귀순 사건'과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다. 군 경계망이 어이없이 뚫렸다는 점, 사건의 축소·은폐가 있었다는 점 등이 아주 흡사하다. 당시 군 수뇌부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CCTV를 통해 북한군 귀순병사 신병을 확보했다"고 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엿새 뒤 당시 김광진 의원의 폭로로 북한군 귀순 병사가 우리 장병 생활관(내무반) 문을 두드릴 때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반면 두 사건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다. 노크 귀순 사건 때는 청와대의 축소·은폐 개입 의혹이 부각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청와대가 군과 함께 이번 사건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이번 사건 발생 직후부터 해경·군·국정원 등을 통해 북 목선이 삼척항 내로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 당국의 '삼척항 인근' 운운 브리핑에 대해 제동을 걸지 않았다.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 21일 "(입항 귀순 관련) 보도가 나갔으면 안 됐다"며 "만일 4명이 다 귀순 의사를 갖고 넘어왔다면 그것이 보도됨으로써 남북 관계가 굉장히 경색됐을 것"이라고 했다. 윤 수석의 말은 청와대가 남북 정상회담 성사 등을 위해 민감한 귀순 문제 노출을 꺼렸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한다. 한 소식통은 "청와대와 군 수뇌부는 이번 사건이 9·19 남북 군사 합의에 따른 대북 대비 태세 이완으로 발생하지 않았느냐는 여론이 조성될까 노심초사했다"며 "이에 따라 17일 서둘러 발표가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일관된 현 정부의 군 길들이기와 힘 빼기
일각에선 이번 사건을 현 정부 들어 일관되게 이뤄진 군 길들이기 또는 힘 빼기 사례들의 연장 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 정부 들어 사드 보고 누락 의혹 사건을 시작으로 박찬주 대장 갑질 논란, 청와대 행정관의 육군참모총장 면담, 기무사 계엄령 검토 문건 논란, 9·19 군사 합의 등이 이어졌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현역 장성이나 간부들은 정부의 정책에 합리적인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어려운 분위기가 됐다고 한다. 과거 정부에 비해 철저한 인사 검증으로 '문제 인사'들을 솎아낸 것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장성은 이렇게 전했다.
"진급 축하 모임에서 군 수뇌부로부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본인은 물론 주변까지 철저한 검증을 거친 사람들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검증엔 도덕성뿐 아니라 이른바 적폐 성향이나 경력도 포함됐던 것으로 안다."
이 때문에 군내에선 이번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느냐. 경계 실패는 인정하지만 억울한 점도 많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럼에도 여론은 군에 결코 동정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동안 군의 핵심 가치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간 우리 군에는 매티스 전 미 국방장관처럼 통수권자의 정책에 맞서 사표를 던진 수뇌부가 없었다.
◇정권의 군대가 돼가는 홍길동군
이번 사건이 발생한 뒤 군 관계자들은 해안 감시 레이더나 열상 장비(TOD)가 노후했거나 드넓은 바다를 지킬 함정이나 초계기가 부족하다고 하소연한다. 일리가 없지 않은 얘기다. 하지만 좀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정신 자세다. 이번에 북 목선은 총 세 차례에 걸쳐 우리 군경의 해안 감시 레이더, 지능형 영상 감시체계, CCTV 등에 잡혔다. 그러나 레이더에 잡힌 줄 아예 몰랐거나 우리 어선으로 착각해 놓치고 말았다.
국방부는 지난달 발사된 북한의 신형 탄도미사일에
대해 두 달 가까이 "분석 중"이라며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 한국군은 탄도미사일을 탄도미사일이라 하지 못하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정권의 군대가 돼가는 '홍길동군(軍)'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번 사건이 정권의 군대가 돼가는 홍길동군을 재확인해주는 사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경계 실패보다 더 크고 무서운 이번 사건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