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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풍경 좋고 걸을만한 옛길이 어디 있을까?

산야초 2015. 9. 13. 22:11
가을에 풍경 좋고 걸을만한 옛길이 어디 있을까?

 

가을에 걷기 좋은 고즈넉한 길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우리의 옛길의 정취를 맘껏 느끼면서. <월간산> 박정원 기자가 역사와 옛 인물이 녹아 있는, 그리고 가을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옛길을 모아 <옛길의 유혹, 역사를 탐하다>(내안의뜰刊)란 제목으로 책으로 냈다. 단순히 걷기 좋고 풍경 좋은 옛길만이 아니라 회한과 통한, 恨과 情이 스민 옛길을 찾아다니며 역사와 인물을 자료와 구전으로 만나 정리했다.

 

다산오솔길 초입에 있는 뿌리의 길. 정호승 시인이 명명한 길이다.

다산오솔길 초입에 있는 뿌리의 길. 정호승 시인이 명명한 길이다.

 

퇴계가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러 청량산에 가면서 ‘그림 속을 걷는 산책길’이라고 명명한 <안동 퇴계 오솔길>을 걸으면 정말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실제 걸으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한번 나온 감탄은 그칠 줄 모른다. 마침 날씨가 맑아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한 하늘다리까지 보인다.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서야 비로소 강의 모습을 갖춘다’라는 말이 있듯이 청량산의 깊은 계곡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해서 제법 강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곳의 강줄기를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고 한다. ‘여러 지천이 모여 이룬 길고 깊은 소’의 뜻이겠다. 퇴계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도미천망산(渡彌川望山)’을 남겼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퇴계오솔길.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퇴계오솔길.

 

<강진 다산 유배길>에서는 길을 걸으면서 ‘상실과 깨달음, 그리고 배움’을 느낄 수 있다. 다산과 혜장 선사가 주고 받았을 법한 대화를 상상해본다.

“실학은 실생활에서 도움 되는 학문을 배우자는 것인데,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지요?”

“그 실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한 마음을 가다듬자는 것이지요. 소생이 부처님의 그 깊고 깊은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소만, 실학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둘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자가 많은 이 나라가 어찌 이렇게 당파가 극심해 혼란해졌을까요?”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이겠지요. 가다듬지 못한 마음으로 사익을 앞세운 배움 때문 아니겠는지요.”

 

동백과 야생녹차,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고가는 길 위의 아름다운 자연에 흠뻑 젖어 두 선인은 분명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리라. 그리고 다산 스스로 학문의 깊이를 더했을 그런 산책로였을 것이다. 묘하게도 백련사는 백련결사로 유명한 고려시대 불교 개혁운동의 본산이었던 곳이며, 혜장 스님은 그 백련사의 주지였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병폐를 인식하고 실생활 중심의 학문을 주장한 다산과 혜장의 만남은 시대를 뛰어넘은 화두가 일치했던 셈이다.

 

 

계립령 하늘재 비석이 있는 입구.

계립령 하늘재 비석이 있는 입구.

<영월 김삿갓 길>에서는 재치와 해학이 넘친다. 영원한 방랑시인의 시를 맘껏 향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삶까지 이해할 수 있다.

김삿갓은 자연에서 삭이던 그의 울분은 급기야 선비에 대한 조소와 해학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이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서당을 욕하다)’이다.

書堂來早知 서당내조지   서당에 일찍 와서 보니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방안에는 모두 존귀한 분들만 있고

生徒諸未十 생도제미십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되는데

先生來不謁 선생내불알   훈장은 나와 보지도 않더라

방랑생활 중 서당 훈장에게 홀대를 받자 즉석에서 걸쭉한 육담시를 지어 훈장을 조롱했다. 발음 나는 대로 읽어도 욕이고, 그 뜻도 또한 욕이다.  

고창 질마재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들.

고창 질마재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들.

단종이 어쩔 수 없이 왕위에서 물러나 비참하게 걸어가야 했던 원주 ‘싸리재’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지닌 인물과 역사들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길에서 되살아난다. 전국의 걷기 좋은 아름다운 옛길 19곳을 엄선해서 가을에 사색하면서 걸을 수 있도록 역사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책에서 소개한 옛길은 다음과 같다.

원주 싸리재_ 핏빛 권력쟁탈로 쫓겨난 통한의 고갯길

수원 능행차로_ 정조에 의한, 정조를 위한, 정조의 길

장성 홍길동의 길_ 도적이 된 양반, 홍길동

안동 퇴계 오솔길_ 그림 속을 걷는 산책길

무왕길_ 찬란한 백제 유산 역사길

강진 다산 유배길_ 상실과 깨달음, 그리고 배움

영월 김삿갓 길_ 재치와 해학으로 노래한 시인

해인사 천년역사길_ 최치원의 흔적을 찾아 가는 길

강릉 대관령 옛길_ 신사임당이 걸었던 최고의 옛길

진도 삼별초의 길_ 반역과 자주의 역사길

옛길 문경 토끼비리_ 전통과 근대의 만남, 길 박물관

삼척 관동대로_ 백두대간 따라 걷는 동해 절경

고창 질마재_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

장성 삼남대로 갈재_ 하늘이 내린 풍요로운 선조들의 길

부여사비 길_ 찬란한 백제의 숨결이 머무는 역사길

계립령 하늘재_ 시대와 전설, 불교문화를 아우르는 역사길

영주 죽령_ 삼국시대 군사요충지이지 불교, 유교 전승로

부산 금정산 누룩 길_ 한반도 첫 번째 일출을 만나는 길

광주 무등산 옛길_ 도심 속 생태 역사길

옛길의 유혹 책 표지.

옛길의 유혹 책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