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박정희와 박태준

산야초 2015. 10. 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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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2014.09.02 (화)
1961년 11월 11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빼빼로 데이’라 부르는 그날, 박정희가 통치자로서 최초 해외 순방에 나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4)]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2014.08.28 (목)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엔간히 안정 기반을 다진 1961년 7월, 서울은 무더위에 갇혀 있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비서실장 박태준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 아무개 노인이 국군에 들어간 아들..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3)]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2014.08.25 (월)
박정희는 호랑이 등에 완전히 올라탔다. 박태준도 그 뒤에 앉았다. 전진을 멈출 수도 스스로 내릴 수도 없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2)]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2014.08.21 (목)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1)]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2014.08.20 (수)
이철승은 유효한 줄이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거사의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1961년 1월 박태준은 귀국..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0)]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2014.08.18 (월)
“광주로 같이 가자. 참모장을 맡아줘.”대취에서 깨어난 박정희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박태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최소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좌천당한 울분과 과음의 후유증 ..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9)]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2014.08.14 (목)
4·19의 신선한 기풍이 군부에도 쇄신 바람을 일으켰다. 군부는 변해야 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비롯한 핵심참모와 숙의하고 드디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것은 1960년 5월 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8)]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2014.08.11 (월)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관사는 동래 온천장 동네였다. 이른 봄날에 박정희는 술집의 일차를 마치면 얼큰한 술기운 속에서 곧잘 자기 관사로 참모들을 몰고 갔다. 대화도 노래도 참으로 편한 장소였다. 관사로 가자, 나를 따르라..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7)]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2014.08.06 (수)
1958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하여 25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박태준은 1959년 3월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으로 부임하여 그해 8월 미국 연수를 다녀온다. 9월 17일 귀국. 자리는 그대로..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6)]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2014.08.05 (화)
단 한 번, 박정희는 군대경력에서 박태준의 후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대학이 그것이다. 1953년 11월 준장 진급 후 미국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유학하고 광주포병학교 교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있던 박정희가 ..이대환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2014.07.29 (화)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이대환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2014.07.25 (금)
1968년 4월 1일. 이 만우절에는 한국 현대사가 기록할 두 가지 ‘특별한 기념식’이 열렸다. 장소는 대전과 서울. 대전의 것은 거창하고, 서울의 것은 조촐했다. 다만 시작이 조촐하다 해서 미래도 그래야 한다는 ..이대환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2014.07.21 (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下) 191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 1927년에 태어나 2011년에 생을 마친 박태준. 십 년 차이로 이 험난한 땅에 태어나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이대환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2014.07.15 (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中) 정치냐 경제냐, 이 갈림길이 박태준의 눈앞에 나타난 때는 1963년 9월이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박정희..이대환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2014.07.08 (화)
진정한 신뢰로 위대한 일을 창조한 ‘롤 모델’이 우리 권력동네엔 없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이 답할 것이다. 한국산업화의 강건한 견인차였던 포항종합제철, 지난 3일로 준공 41주년을 맞았다.“포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이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