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박근혜 정부를 움직이는 77인

산야초 2015. 10. 10. 21:27

 
[토요판 커버스토리]
 
박근혜 정부를 움직이는 77인
 

기사입력 2013-03-16 03:00:00 기사수정 2013-03-16 13:49:14

 
 

“그건 진영 부위원장과 얘기하세요. 제가 좀 바빠서요.”

올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조직법과 관련해 상의를 해오는 한 측근에게 한 말이다. 김용준 인수위원장도 국무총리 낙마 다음 날 진 부위원장(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인수위원장직은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정말 직을 유지하라는 게 당선인 뜻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기능의 사실상 투 톱인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과 이정현 정무수석비서관의 책상에는 요즘 새누리당 의원들의 민원서류가 쌓여가고 있다고 한다. 민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당 쪽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꾸역꾸역 몰려드는 민원서류는 박근혜 정부의 파워가 어디에 실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유민봉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이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지는 진 장관이나 허 실장, 이 수석보다 더 오래됐다. 유 수석은 2000년대 초반 박 대통령의 행정학 관련 자문 그룹으로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2007년 대선 경선 때까지는 활발히 조언을 해주다 그 이후에는 만남이 뜸하긴 했지만 ‘박근혜 수첩’의 한 귀퉁이에는 그의 이름이 늘 적혀 있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유 수석은 요즘 박 대통령과 30분간, 심지어 1시간가량 통화할 때도 있다.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다 말하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수년 전 한 지인에게 “아버지로부터 배운 용인술이 있다. 일 잘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줘서 일을 시키되, 뒤에서 자문에 응해줄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의 사람들처럼 공개된 직책을 갖고 일을 하는 사람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박 대통령이 맡긴 일을 수행하거나 자문에 답할 사람…. 이른바 ‘박근혜의 사람들’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실세’라고 부른다. 영향력의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박근혜 정부 곳곳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움직이는 사람들과 박 대통령의 인연을 추적해봤다.

 
 
 
▼ 내각의 진영, 靑 이정현-유민봉… 朴心 가장 가까이 ▼

박근혜 대통령 1기 사람들(1998∼2004년)


2002년 4월 25일. 박 대통령은 한국미래연합 창당 준비위원장 자격으로 발기인 3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자신의 당내 민주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자 정치생명을 걸고 탈당 승부수를 던졌을 때다.

1998년 재·보궐선거로 국회에 들어온 지 4년도 채 안 된 재선 의원에게 탈당 두 달 만의 신당 창당은 버거운 일이었다. 당시 발기인 명단을 보면 박 대통령의 초기 인재풀의 협소함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맺은 인연, 청와대를 나와 은둔 생활을 할 때 정수장학회나 육영재단을 통해 맺은 인연, 대구 달성 지역구 인연 등이 망라됐다. 정치 경력이 짧았던 만큼 정치 인맥보다는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됐다.

발기인 중 고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은 박 전 대통령 시절 여성 최초의 청와대 출입기자, 양영태 자유언론인협회 회장은 박 전 대통령 담당 치과 주치의였다. 최필립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아버지 밑에서 의전,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김정욱 전 세종대 교수는 1980년대 영남학원,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이사를 지냈고 김광웅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정수장학회, 한국문화재단 이사를 지냈다. 하영태 당시 대구교도소 교화협의회장은 지역구인 대구 달성상공회의소장 출신이다.

과거 청와대 시절부터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 온 이들 그룹이 ‘원조’ 자문그룹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 시기 박 대통령의 정치 보좌는 정윤회 전 비서실장이 주도했다. 그는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 씨의 남편이다. 1998년 국회의원 첫해 박 대통령의 의원실 보좌진이었던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과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고 이춘상 보좌관이 모두 정 전 실장 밑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정식 보좌진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입법보조원’ 신분으로 출입증을 받아 다녔다고 한다. 2004년 박 대통령이 당 대표가 된 뒤엔 “공조직이 대표를 모셔야 한다”며 자진사퇴했다. 이후 박 대통령과 관련된 공개된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친박 핵심 인사들은 오히려 2007년 대선 경선 이후에는 박 대통령과 거의 접촉도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수행을 담당했던 이대구 씨는 현재 서울 마포에서 경호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 씨가 2000년대 초반에 그만두면서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 수행을 맡아 왔다.

박 대통령은 1998년 국회 입성 이후 공부모임을 만들려고 애를 썼다. 동료 의원들을 비롯한 여러 통로로 전문가들을 추천받으면 이재만 보좌관(총무비서관)을 통해 조용히 불러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1세대 대표적 정책 핵심 멤버는 최외출 영남대 교수다. 최 교수는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나와 사실상 은둔했던 기간에도 교류를 지속했으며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 출마할 때 선거를 도왔던 원년 멤버다.

지난해 대선 때 국민행복추진위원으로 참여했던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와 유민봉 국정기획수석도 이때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한양대 교수였던 새누리당 나성린 의원도 박 대통령의 조언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 2기 사람들 (2004∼2007년)

# 본격적인 정치 인맥 확장기

2003년 6월 한나라당 대표 선거가 열렸다. 최병렬 체제가 출범하면서 민정계가 득세했지만 1년도 안 돼 대선자금 수사와 탄핵 역풍이 겹쳐 이듬해 2월 최 대표가 낙마했다. 민정계 중진의원들이 대거 물갈이되면서 2004년 3월 박근혜 대표 체제가 출범했다. 이후에는 주변에 자연스레 민주계 출신 참모가 많아졌다. 거기에 이회창 총재 계열이었던 소장파 그룹도 대거 합류했다.

박 대통령이 당 대표를 지낸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정치 인맥 확장기였다.

당내 지분이 없던 박 대표였지만 2004년 총선 때 무너져가던 당을 살려낸 기세로 전권을 쥐고 당내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박 대통령의 측근 의원그룹은 당시 인연을 맺은 이들이다.

대표 시절 ‘비서실장’에 임명했던 이들이 진영 유정복 유승민 의원, 이성헌 전 의원이다. 진 의원은 보건복지부 장관, 유정복 의원은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박근혜 정부의 내각을 떠받치고 있다. 김무성 허태열 전 의원은 대표 시절 사무총장으로 함께 일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대선 총괄선대본부장을 지냈고 허 전 의원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청와대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당직에 임명된 이들이 친박에 합류했다. 서병수 의원은 당시 정책위의장을 맡아 박 대통령과 함께 전자발찌법안을 통과시키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최경환 의원과 이혜훈 전 의원 역시 정책조정위원장을 지내며 가까워졌고 김태환 의원은 제1사무부총장, 김재원 의원은 기획위원장을 지내며 박 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했다.


# 2007년 대선 경선

2006년 6월 박 대통령이 당 대표직을 그만두기 직전 서울 여의도 진미파라곤 건물에 작은 사무실이 마련된다. 이듬해의 대선 경선을 비밀리에 준비하는 사무실이었다. 이곳에서 김무성 유정복 유승민 이성헌 등 전현직 의원과 이병기 여의도연구소 상임고문 등 5명이 경선 준비를 시작했다. 이른바 FM(Five Members)으로 불렸던 이들이다. 2006년 8월경 이 멤버들은 서울 여의도 엔빅스 빌딩으로 옮겨 1주일에 한두 번씩 비공식 모임을 갖고 대선을 준비했다. 김무성 전 의원이 중심이 됐다가 그해 11월경 잠시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이 중심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해 12월 최경환 의원이 종합상황실장으로 합류하고 안병훈 기파랑 대표와 홍사덕 전 의원이 선대위 위원장으로 차례대로 합류하면서 캠프가 모습을 갖췄다.

당시 비밀리에 경선 캠프를 구성할 때부터 보좌했던 실무그룹이 있다. 이정현 대통령정무수석, 김선동 정무비서관, 신동철 국민소통비서관, 장경상 국정기획수석실 선임행정관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박 대통령의 실세 보좌진 3인과 함께 한결같은 박 대통령의 친위부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영삼(YS)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민주계가 있다. 그들의 당시 좌장은 김무성 전 의원이다. 이성헌 전 의원, 김선동 비서관,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 등이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의원 시절부터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이 담당했다. 2004년 당 대표 시절부터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과 하윤희 새누리당 정책위 전문위원이 합류했다. 2007년 대선 경선 때 하 위원이 빠지고 최진웅 연설기록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 새로 합류했다. 이들은 7년 가까이 메시지를 담당하고 있다.

홍보 사단의 핵심 참모는 고 이춘상 전 보좌관과 허유근 경선 캠프 홍보제작단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 경선 때 LG애드 상무이사였던 허 전 단장을 영입했다. 2008년 허 전 단장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경선 홍보기획단장을 지낸 백기승 대통령 국정홍보비서관이 홍보사단을 물려받았다. 백 비서관은 2008년부터 서울 마포에 회사를 차려놓고 명절이나 새해 인사 동영상을 만들거나 각종 영상 자료를 축적했다. 당시 마포팀 실무진은 총선 때 조동원 홍보본부장, 대선 때 변추석 홍보본부장 밑에서 손발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해 12월 이 전 보좌관과 함께 사고로 사망한 김우동 홍보팀장도 마포팀 소속이다.

대선 경선 캠프에서 조직과 직능은 김무성 전 의원과 허태열 비서실장이 양분했다. 김 전 의원이 조직총괄본부장을, 이성헌 전 의원이 조직총괄단장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이 전 의원은 2007년 경선 캠프 이후에도 희망포럼을 만들어 전국 외곽조직을 계속 관리했다. 허 비서실장은 직능총괄본부장을 맡고, 당 직능국장을 오래 지낸 김태원 의원이 중앙위단장을 맡았다. 지난해 대선 때는 유정복 행정안전부 장관이 직능을 책임졌고 당 직능국장이었던 최상화 청와대 춘추관장이 실무를 맡았다.

원로그룹도 경선 캠프 고문이란 직함으로 처음 진용을 드러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낸 김용환 전 의원은 충청지역 조직에도 관여하고 전반적인 정무와 관련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제출했다. 아버지 시절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한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정수장학회 동창회인 상청회장을 지낸 현경대 전 의원을 비롯해 강창희 국회의장, 서청원 전 대표 등이 고문단을 형성했다.


# 정책 그룹의 태동

2006년 9월 대선 경선에 대비해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좌장으로 ‘경제자문회의’가 구성된다. 당시 회의 참석자는 남 전 총리를 비롯해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차동세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유승민 의원과 이혜훈 전 의원, 신세돈 최외출 안종범(성균관대) 김영세(연세대) 이종훈(명지대) 방석현(서울대) 교수 등이었다. 이들은 1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 공약을 만들었다. 당시 박근혜 캠프의 핵심 공약인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고)는 이 모임에서 만들어졌다.

경선 캠프 정책메시지총괄단장을 맡았던 유승민 의원이 인맥을 동원해 많은 교수를 끌어왔다. 남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재무부 장관을 오래 지낸 서강학파 1세대로 박 대통령의 당시 선대위 후원회장을 지냈다. 비경제 정책 자문단은 별도로 꾸려져 있었다. 외교안보 라인은 황진하 의원, 남재준 국정원장 내정자,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 등이 자문그룹을 형성했다. 교육 분야는 이상주 전 교육부총리와 문용린 서울시교육감 등이 핵심이었다. 과학 분야에선 서상기 의원 등이 활동했다.


‘박근혜 정부를 움직이는 사람들’을 대거 배출한 국가미래연구원이 2010년 12월 설립 모임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 뒤로 김광두 원장,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이학재 의원(오른쪽부터) 등의 모습이 보인다. 동아일보 DB
 
 
▼ 신세진 사람? 신세질 사람에게 자리 준다 ▼

박 대통령 3기 사람들(2008∼2012년)



# 사실상 정치적 칩거기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다수의 친박 인사가 대거 낙천하자 일부 인사는 박 대통령을 찾아가 탈당을 권유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박 대통령은 18대 국회 내내 자신이 친박이라는 한 계파의 수장처럼 비치지 않을까 하며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친박 의원들의 총선 낙천 이후 김무성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친박 무소속 연대와 홍사덕 전 의원, 서청원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박연대가 총선에 나섰을 때도 박 대통령은 “살아서 돌아오시라”는 한마디 외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돌풍을 일으켰고 노철래, 조원진 의원 등이 새누리당에 합류하면서 박 대통령의 큰 우군이 된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뜻밖의 외곽 확장인 셈이었다.

18대 국회 초반 박 대통령은 거의 정치적 칩거에 들어간다. 2기가 정치 인맥의 확장기였다면 3기는 정책 인맥의 확장기다. 박 대통령은 18대 국회 내내 ‘친박’을 앞세운 그 어떤 모임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이계를 포섭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의원들과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측근들의 건의를 받고 18대 국회 중반 초선 의원 중심으로 몇 명씩 모아 식사를 하는 정도였다. 18대 국회 초반 김무성 전 의원을 친박계의 좌장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한 친박 핵심 인사는 “김 전 의원을 좌장으로 앉히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국가지도자가 아닌 한 계파의 수장으로 비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허태열 비서실장과 유승민 의원이 친박 진영 대표로 전당대회 선거에 나간다고 할 때마다 박 대통령이 만류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

18대 국회 때 누구도 친박 진영의 좌장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자연스레 서병수 최경환 의원이 중심 역할을 했다. 18대 국회 후반기 서병수 유정복 최경환 이학재 이성헌 이정현 등이 참석하는 친목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6인회’로 불렸다. 뒤늦게 허태열 비서실장이 합류해 ‘7인회’로 확장된다. 이 친목 모임 멤버들이 현 정부의 실세로 자리 잡게 된다.

다만 진영 장관은 이 모임에 끼지 못했다. 친박→탈박→복박을 오간 그는 지난해 이한구 원내대표와 러닝메이트로 정책위의장이 된 뒤 총선 대선 때 공약 실무를 총괄하며 박 대통령의 신뢰를 120% 회복했다.

친박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해 준 계기는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었던 세종시 수정안이었다. 친박은 당시 세종시 수정안이 박 대통령을 고사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고 필사적으로 뭉쳤다.


박근혜 정부의 실세로 부상한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왼쪽)과 유민봉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 동아일보 DB
 
 
# 총선, 대선 경선 준비

박 대통령이 정치적 칩거를 마친 건 2011년 9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지원유세부터다. 그해 12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정치 무대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길이 보이지 않는데도 당을 위해 비대위원장직에 떠밀려 나가야 하는 상황에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이 시기에 이른바 중립, 소장파 의원들로까지 정치적 인맥을 확장하며 사실상 당을 장악한다. 지난해 4·11총선 때 전멸 위기 속에 김세연 주광덕 황영철 김성태 의원 등 소장파가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하거나 의원총회에서 박 대통령에게 힘을 모아줬다. 소장파였던 권영세 전 의원은 당 사무총장을 맡아 박 대통령과 함께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소장파가 밀었던 황우여 당 대표와 이주영 의원도 이때 가까워져 대선 때 핵심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의 총선 승리는 비박 경선 주자들의 의지를 꺾는 동시에 새누리당 의원 대부분을 ‘친박화’하는 데 성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강석훈 이상일 서용교 박대출 이종훈 등 친박 초선 의원들도 대거 합류했다. 총선 과정에서 대변인을 맡은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청년 유세와 정책에 관여한 김상민 인수위 청년특위 위원장도 급속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는다.

박 대통령은 이미 총선 이전부터 대선 경선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총선 직후 지인에게 “이번 대선 경선 캠프 때는 정책위원회를 별도로 운영할 것”이라며 캠프 구성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경선 캠프 구성 작업은 최경환 의원이 했지만 사람은 철저하게 박 대통령이 직접 골랐다. 대선 본선까지를 염두에 둔 인선이었다. 유정복 직능본부장, 홍문종 조직본부장, 윤상현 공보단장, 안종범 정책메시지본부장, 윤병세 김장수 정책위원 등은 대선 본선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정책 인맥 최대 확장기

2007년 경선 패배 이후 12월 경제자문회의 송년회 모임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공부를 좀더 하고 싶다”며 공부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2008년 1월부터 공부모임이 가동됐다. 김광두 신세돈 김영세 최외출 안종범 등 이른바 ‘공부모임 5인방’이 기본 멤버였다. 이 모임에는 이종훈 의원과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도 참석했고 유승민 의원과 이혜훈 전 의원도 가끔 모습을 나타냈다. 박 대통령 국정철학의 근간이 되는 2009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설 ‘원칙 있는 자본주의’가 이 공부모임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모임은 2008년과 2009년 정점을 이루다 모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이 모임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 이한구 원내대표, 강석훈 의원 등을 주축으로 한 별도의 공부모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모든 정책 인재풀을 누구의 도움 없이 관리할 수 있게 된다.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도 한국에 입국할 때마다 만나 ‘창조경제’와 관련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2010년 12월 국가미래연구원이 설립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박 대통령이 연구원을 자신의 싱크탱크라고 밝힌 적은 없지만 실제 박 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정책 인맥 풀의 대부분을 연구원에 합류시켰다. 연구원 발기인 명단을 보면 2008년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박 대통령이 인재 풀을 넓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병세 외교통상부 장관, 서승환 국토해양부 장관, 류길재 통일부 장관, 최성재 대통령고용복지수석비서관, 곽상도 민정수석비서관, 김재춘 교육비서관,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후보자,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등이 당시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박 대통령은 이 시기에 현직 관료들도 비공식적으로 많이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정부 관료 출신 내각 인사들 중 상당수는 이때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대선 기간 정책은 김종인 전 비대위원이 주도권을 쥐었다. 경제민주화로 총선 승리에 기여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김 전 위원은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맡아 공약을 주도했지만 경제민주화의 범위를 두고 박 대통령과 생각이 달라 서서히 멀어진다. 국민행복추진위 구성 때도 박 대통령이 직접 위원까지 선정한다. 김장수 대통령국가안보실장, 박흥렬 대통령경호실장, 윤성규 환경부 장관,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 등 현 정부의 실세로 부상한 이들이 이때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에필로그


‘박근혜의 사람들’의 모든 역사를 다 아는 사람은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등 대통령의 보좌진이다. 드러나지 않은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을 스쳐 지나갔고, 또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의 ‘수첩’ 속에 들어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움직이는 사람들도 오늘은 실세일 수 있지만 내일은 허세가 될 수도 있다. 한 친박 핵심 인사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이렇게 정의했다. “신세 진 사람에게 자리를 주지 않고, 신세 질 사람에게 자리를 준다.” 향후 5년, 누가 또 ‘박근혜의 사람들’ 속에 포함되고 누가 사라질 것인가.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