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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살아있는 그리스 와인 - 시대에 맞게 변했지만… 수천 년 전통 그대로

산야초 2016. 4. 18. 21:43

시대에 맞게 변했지만… 수천 년 전통 그대로

테트라미토스(Tetramythos) 와이너리는 신약성경에 '고린도'로 나오는 그리스 고대 도시 코린토스(Korinthos)와 그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로아니아산(山) 중턱에 있었다.
그리스 주요 와인 산지 중 하나인 파트라스(Patras)다. 이곳 와인메이커 파나요티스 파파야노풀로스를 따라 지하 와인숙성실로 내려갔다.

    입력 : 2016.04.17 06:23

    전통이 살아있는 그리스 와인

    ◇古代 '송진 와인' 레치나

    와인숙성실에는 한국 장독보다 조금 날렵한 모양이지만 크기는 거의 같은 토기(土器)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파파야노풀로스는 "800년 된 암포라(amphora·몸통이 불룩한 항아리)"라며 "여기에다가 레치나(retsina) 와인을 고대 그리스에서 만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아테네를 둘러싼 아티카 지역에서 그리스 토종 사바티아노 포도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 뒤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쳐진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김성윤 기자

    레치나는 그리스어로 송진(松津)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포도주를 암포라에 담아 숙성시키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새거나 흐르지 않도록 암포라 안쪽과 뚜껑에 소나무 수액을 발랐다. 맛보다는 보관과 유통을 위해 사용하게 된 송진이지만, 차츰 그리스 사람들은 송진 냄새가 밴 와인을 좋아하게 되었고, 이를 레치나 와인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게 됐다.

    파파야노풀로스가 레치나 와인을 한 잔 따라 줬다. 와인에서 솔잎 음료 냄새가 났다. 천년 전 그리스 사람들이 마시던 와인과 똑같은 와인을 21세기에 마실 수 있다니, 와인의 품질이나 맛과 관계없이 묘한 감동이 입안 가득 퍼졌다.



    ◇기원전 2000년 그리스에 들어와

    그리스는 와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기묘한 땅이다. 물론 그리스는 세계 최초로 와인을 생산한 곳은 아니다. 포도 재배와 와인이 시작된 건 중동 어디쯤으로 추정된다. 중동에서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에 소개된 건 기원전 2000년으로 와인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페타 치즈가 올라간 그리스식 샐러드와 산토리니에서 생산된 화이트와인. 그리스 사람들은 와인만 마시는 경우가 드물고 항상 음식을 곁들인다. /김성윤 기자

    영국의 세계적 와인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은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형태의 와인은 그리스에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양조용 포도 재배기술과 와인 생산기술이 그리스에서 개발된 것이 많다는 소리다. 포도밭 단위면적당 포도 수확량을 제한해 포도의 당도를 끌어올린다거나, 어떤 포도품종이 어떤 토양에서 잘 자라는지를 면밀히 관찰해 적용함으로써 와인의 품질을 높이는 기술 등을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발하고 체계화시켰다.


    그리스 사람들은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기술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 반드시 포도나무를 가져다 심었고 자신들의 식생활에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던 와인을 만들었다.


    그리스 와인은 로마를 지나 비잔틴시대까지 최고급으로 유럽 전역에서 비싼 가격에 팔렸고, 그리스 최고의 수출품목이었다. 2011년 해양 고고학자들이 프랑스 남부 해안에서 고대 그리스 선박을 인양했다. 배에는 1만 개나 되는 암포라가 실려 있었다. 암포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와인이나 올리브오일 따위 액체를 저장할 때 사용하던 토기를 말한다. 인양된 암포라에는 프랑스로 수출하려던 그리스 와인이 담겨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암포라 1개당 용량이 약 30리터니까 배에 실려 있던 와인은 30만 리터. 오늘날로 따지면 40만 병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토종 포도품종만 350종

    그리스 와인의 몰락은 비잔틴제국의 멸망과 함께 찾아왔다. 비잔틴에 이어 그리스를 통치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종교는 술을 금하는 이슬람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지배자들은 와인에 극심한 규제와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스 와인산업은 400년 동안 발전을 멈췄다. 1800년대 후반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필록세라 전염병으로 포도나무가 모두 죽고 포도원이 파괴됐다. 이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내전(內戰)으로 그리스 와인산업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김성윤 기자

    그리스 와인이 잠에서 깨어난 건 1980년대 중반이다. 와인 컨설턴트 그레고리 미카일로스(Michailos)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와인 선진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젊고 야심 찬 와인생산자들이 그리스 와인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오랜 침체는 독(毒)에서 약(藥)으로 바뀌었다. 현대 와인의 종주국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등 맛 좋고 생산량 많은 포도품종이 전 세계 포도밭을 석권했다. 세계 와인 수준이 상향 평준화된 건 장점이지만, 개성이 약해지고 비슷한 와인이 돼버린 단점도 있었다. 그리스는 소위 '국제 포도품종'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고, 덕분에 토종 품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미카일로스는 "현재 그리스에는 포도품종이 약 350종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최대 400 품종까지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며 "시골 구석구석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여태 알려지지 않았던 품종이 발견되고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세계 어디서도 생산하지 못하는 개성 있는 와인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바람 피하는 '바구니' 재배방식도

    현대 그리스 와인생산자들은 첨단 테크닉을 도입하되 전통 역시 놓지 않고 지킨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 산토리니 섬의 양조업자들은 '쿨루라(kouloura)'라는 전통 방식대로 포도를 재배한다. 쿨루라는 그리스어로 바구니를 뜻한다. 포도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대신 땅바닥에 납작 누웠다. 줄기와 가지는 바구니 모양으로 둥그렇게 말려 있다. 포도잎과 줄기가 포도송이를 감싸 안는다. 도멘 시갈라스(Domaine Sigalas) 와인메이커 파나요타 칼로게로풀루(Kalogerpoulou)는 "바람과 햇빛이 가혹하달 만큼 강렬한 산토리니에서 포도를 보호하기 위해 수천 년 전 개발된 재배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산토리니 전통 포도 재배방식 ‘쿨루라’. 강한 바람과 태양으로부터 포도송이를 보호하기 위해 포도나무 가지를 땅바닥에 눕혀 바구니처럼 둥글게 말았다. /김성윤 기자

    전통뿐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와인 생산방식도 현대 그리스 와인의 특징이다. 그리스 주요 레드와인 산지인 네메아(Nemea)에 있는 양조장 크티마 첼레포스(Ktima Tselepos) 주인 겸 와인메이커로 현대 그리스 와인업계 리더 중 하나로 꼽히는 야니스 첼레포스(62)는 "내가 원하는 대로 와인을 만드는 게 아니라 포도밭과 포도가 내게 말하는 대로 와인을 만든다"고 했다.

    그리스의 흙과 바람과 포도가 앞으로 어떤 와인을 만들라고 그리스 와인생산자들에게 말해줄지 기대됐다. 마침 와인처럼 붉은 석양이 포도밭 너머로 지고 있었다.

    400종의 다양한 맛과 향 韓食과도 잘 어울려

    국내에서 맛보는 그리스 와인

    와인의 탄생지인 그리스는 무려 400종의 토착 포도품종을 보유한 '양조용 포도의 종자 은행' 같은 곳이다. 새로운 향과 맛을 찾는 와인애호가들에겐 최적의 와인생산국이다. '그리스 와인을 한 번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맛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우리 먹거리와 입맛에도 잘 맞는다.

    /조선DB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그리스 와인, 부타리 모스코필레로(Boutar iMoschofilero) 2013

    부타리 가문은 그리스에서 중요한 와인생산자로 4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모스코필레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풍성한 흰 꽃과 시트러스 등 복합적인 향에 높은 산미와 깔끔한 뒷맛을 지녀 여심(女心)을 자극한다. 봄과 여름 시원하게 식전주로 즐길 수 있다. 구운 생선이나 생선튀김, 연근샐러드, 새우겨자채 등과 잘 어울린다. 3만3000원(소비자가), 그리스와인센터(수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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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와인스펙테이터 톱100에 꼽힌 게로바실리우 화이트(Gerovassiliou White) 2014

    반겔리스 게로바실리우(Vangelis Gerovassiliou)는 고대 품종 말라구시아를 멸종 위기에서 현재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종으로 부활시켰다. 말라구시아 50%, 아시르티코 50%로 블렌딩됐다. 이국적인 과실, 피망, 재스민, 멜론, 레몬 향이 어우러지며, 부드러운 질감과 풍부한 미네랄 풍미를 자랑한다. 여운에 느껴지는 스파이스 풍미가 더욱 다양한 음식과의 매칭을 돕는다. 크림소스 파스타,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넣은 볶음요리, 토마토를 듬뿍 넣은 샐러드와 추천된다. 7만5000원, 헬레닉와인.

    /조선DB

    ■산토리니 홍보대사 가발라스 산토리니(Gavalas Santorini) 2013

    손으로 선별 수확한 뒤 양조하기에 생산량이 매우 적다. 아시르티코 100%. 누룩과 전통주 등 친숙한 향, 입맛을 돋우는 좋은 산미, 미네랄 풍미와 짭짤한 감칠맛을 지녀 음식과 즐기기에 좋다. 상큼하게 무친 해초샐러드, 미역을 넣은 문어초회, 강된장을 곁들인 쇠미역쌈, 홍합찜, 해물리조토 및 파스타와 잘 어울린다. 10만5000원, 헬레닉와인.

    /조선DB

    ■역동적인 와인생산자 카토기&스트로필리아 마운틴 피시(Katogi&Strofilia Mountain Fish) 2014

    펠로폰네소스에서 아기오르기티코(Agiorgitiko)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이다. 잘 익은 붉은 열매, 민트, 숲 속 허브들, 사냥 고기 고유 향을 지닌 와인으로 입에서는 체리코크에 가까운 풍성한 체리와 스파이스 풍미, 부드러운 타닌을 느낄 수 있다. 레드 와인이지만 와인만으로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부담 없고, 음식과 즐긴다면, 멧돼지 구이, 모듬 소시지 구이, 오리 구이와 추천된다. 2만9000원, 헬레닉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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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공주 결혼연회에 쓰인 크티마 키르 야니(Ktima Kir-Yianni) 파랑가(Paranga) 2011

    키르야니는 부타리 와이너리의 프리미엄급 와인에 붙는다. 나우사(Naossa) 지역 시노마브로 100% 와인. 시노는 '시큼한', 마브로는 '검은'을 뜻하며, 이탈리아의 네비올로 품종과 유사하다. 향수처럼 퍼지는 은은한 꽃, 허브, 스위트 스파이스 풍미가 좋으며, 작고 촘촘하며 풍부한 타닌이 산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노마브로를 처음 맛보는 사람에게 추천하기 좋은 와인이며, 양고기 혹은 마블링이 잘된 소고기 구이와 찰떡 궁합을 자랑한다. 소비자가 3만3000원, 그리스와인센터.

    /조선DB

    ■로버트 파커가 '숨은 보석'이라 찬사한 람니스타(Ramnista) 2011

    시노마브로 100% 와인. 다소 옅은 석류빛에 감초, 약재용 허브, 붉은 과실, 송로버섯, 흙 내음, 수풀 향을 우아하고 섬세하게 전하고 있다. 시노마브로 품종이 지닌 강한 산미와 타닌을 극도로 조화롭고 부드럽게 담은 와인이다. 버섯을 곁들인 소고기 구이, 무와 밤을 넣어 조리한 사태찜, 한방 족발, 다양한 버섯을 넣은 버섯잡채나 전골 등의 매칭이 추천된다. 8만3000원, 그리스와인센터.

    ■그리스 와인 구입처

    그리스와인센터: 서울 종로구 삼청로 4 광성빌딩 6층, (02)730-0515
    헬레닉와인: 서울 서초구 방배동 900-14, (02)3472-8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