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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봄은 담록색 세상… 하지만 홀로 붉은 나무 있으니

산야초 2016. 4. 18. 21:46

제주스케치

제주의 봄은 담록색 세상… 하지만 홀로 붉은 나무 있으니

산과 들, 바다를 넘나들며 제주의 풍경과 풍습을 계절과 시간에 따라 사진에 담아낸 '조의환의 제주스케치'.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생경한 '봄'의 모습을 함께 감상해보세요.

  • 조의환·사진가
  • 편집=뉴스큐레이션팀  

    입력 : 2016.04.16 07:00   


    산과 들, 바다를 넘나들며 제주의 풍경과 풍습을 계절과 시간에 따라 사진에 담아낸 '조의환의 제주스케치'.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생경한 '봄'의 모습을 함께 감상해보세요.


    제주의 5월은 담록색 세상… 하지만 홀로 붉은 나무가 있으니, 그 이름 홍가시나무
    봄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제주의 오월은 담록색(淡綠色) 세상이다. 봄을 덮었던 노란 꽃이 지고 콩깍지처럼 생긴 씨방이 달리기 시작하면,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상한가를 치던 유채밭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찬밥 신세가 된다.
    이런 신록의 한가운데서 홀로 가을을 맞은 듯 온통 붉은 나무가 눈길을 끈다. 상록 활엽수인 홍가시나무다. 봄이면 꽃보다 아름다운 붉은빛을 띠는 새순이 돋아난다. 묵은 녹색 잎 위로 단풍보다 더 아름다운 선홍색 잎이 돋아나니 불꽃이 일어나는 것 같다. 새순이 자라 나무 전체를 점차 빨갛게 물들였다가 다시 녹색으로, 가을이면 붉은색으로 변신한다. 자연도 극심한 대비가 될 때 돋보이는 것이 이치인가 보다. 장미과인 이 나무는 일본, 중국이 원산지인 난대 정원수다. 울타리용으로 인기가 있다. 제주도에는 40년 전쯤 들어온 외래종이라고 한다. 이름과는 달리 가시는 없고, 가시에 찔려 죽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의 가시나무새도 없다. 꽃에 못지않고, 단풍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색, 울안에 심어놓고 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
    서귀포시 안덕면 상창리를 지나는 평화로 옆 한 농원에서 2015년 4월 25일 촬영.


    日帝가 주민 동원해 만든 '알뜨르 비행장'이 너른 벌판에 검고 흰 비닐하우스 풍경
    2014년 4월 15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아래 있는 밭에 비닐하우스가 줄지어 서 있다. 흰색 비닐이 검은색 흙밭과 대비돼 장관을 이룬다. 아침저녁 기온이 낮아 작물이 스스로 움을 틔우기엔 아직 이른 봄, 농부들은 땅의 온도를 높여 수확 시기를 앞당기고자 밭을 비닐로 덮는다.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는 인간의 지혜가 대지미술(大地美術) 작품을 그려낸 셈이다.

    한편 이 '작품'이 자리 잡은 너른 벌판은 과거 일본의 군사시설이었던 '알뜨르 비행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알뜨르는 제주어로 '아래 벌판'이란 뜻. 일본은 1920년대 중반부터 이 일대 주민들을 동원, 활주로를 비롯해 격납고와 탄약고 등을 10년에 걸쳐 만들었다. 중일전쟁 당시 이곳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은 약 700km 떨어진 중국 난징(南京)을 폭격하기도 했다. 아직도 이곳 벌판의 배추밭·감자밭 사이사이엔 20여 개의 격납고가 남아 있다.


    겨울 바닷바람 이겨낸 '이효리 마을' 취나물… 비행기 타고 팔려나간대요
    겨울철 내내 온도가 좀처럼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제주도는 밭작물 재배가 활발하다. 유명 연예인 이효리 부부가 이주하는 바람에 더 유명해진 애월읍의 대표 작물은 겨울 바닷바람을 이겨내는 취나물이다. 봄 향기가 그윽한 들에서 취나물 수확이 한창이다. 야생 유채는 노랑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빈 밭에 잡초들이 파릇파릇 고개를 내밀어 재빨리 씨를 퍼트릴 준비를 한다. 제법 길어진 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할망들은 허리 펼 틈도 없이 작업에 열중한다. 봄이면 산으로 나물을 하러 가시곤 하던 할머니들, 머리에 이고 온 나물 보따리를 풀어 놓으시곤 했다. 쑥이며 달래, 냉이, 원추리 등 온갖 산나물이 수북했다. 요즘은 대부분 산나물이 대량으로 재배되는 형편이니, 나물하러 들로 산으로 가는 여인네들 모습은 보기 드물다. 그래서 요즘 애월 취나물은 귀하신 몸이다. 선도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비행기에 태워 육지로 보낸다. 2월 25일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서 촬영.


    올레길 10코스에서 만난 유채꽃 오솔길… 제주의 봄은 온통 노랑이다
    제주도의 봄을 지배하는 색은 노랑이다. 팽창, 전진하는 성격의 노랑은 멀리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 커다란 팔레트 모양의 제주도는 온통 노랑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 자연의 색은 아름답다. 좋은 걸 그냥 두지 못하는 인간들이 몸치장에 예술과 디자인에 자연의 색을 가져다 쓴다. 잘 쓰면 그 또한 아름답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촌스럽다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지천으로 깔린 게 유채꽃이라 사진 소재로 애써 외면했으나 그냥 지나치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파란 잎이 돋은 찔레 덩굴 사이로 야생 유채가 수줍은 듯 하늘로 향하는 길을 내주고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항에서 산방산 쪽 해안을 따라가는 올레길 10코스를 지나다 만난 작은 오솔길. 2015년 3월 23일 촬영했다.


    한림읍 바닷가에서 만난 湧泉水 물통… 멀리 비양도가 보이네요
    제주도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용천수가 나는 물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제주도는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지만, 빗물이 지표면 아래로 숨어들어 바닷가에서 솟아오른다. 이 물을 이용하기 위해 해안지역에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뤄왔다. 용천수 물통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나물 씻거나 빨래를 할 때도 이 물을 썼다.

    1980년대 상수도가 보급된 이후 물통은 생활 터전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제주도 전체에 900여개가 넘는 용천수 물통이 있지만 물이 마른 곳도 있고 해안 매립이나 도로 확장으로 사라진 곳도 있다. 일부는 마을에서 복원을 하면서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르는 바람에 원형의 맛이 사라졌다. 복원이 아니라 훼손된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예전에는 혼례나 초상, 집을 짓는 일 같은 큰 일이 닥친 집에 물 부조(扶助)를 할 만큼 물은 소중했다. 마을의 역사와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물통. 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됐으면 좋겠다. 사진은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의 소원알물. 멀리 보이는 섬이 비양도다.


    녹색 주단을 깔아놓은 것 같은 加波島 청보리밭… 巨石이 있어 더욱 멋지네요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배로 20분 남짓이면 제주도와 마라도 사이에 있는 가파도(加波島)에 닿는다. 이맘때면 녹색 주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청보리가 온 섬을 덮고 바닷바람에 살랑거린다. 이국적인 풍광이다. 해발 20.5m 둘레가 4km인 섬 속의 섬 가파도.
    본섬에서 보면 거북이 등을 수면에 드러내고 있는 형상이다. 금방이라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것 같다. 청보리밭 샛길을 지나 해안도로로 나온다. 삼방산과 용머리 해안을 바라보면서 산책하며 들이마시는 바닷바람이 상큼하다. 섬의 남서쪽 하동마을 부근에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거석들이 보리밭 곳곳에 있다. 국립제주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해보니 유물이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아 신빙성이 희박하다는 결론이 났다고 한다. 비록 고인돌이 아니라 해도 그냥 보리밭만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조물주의 작품이면 어떻고 고대인의 작업이면 어떤가.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선생의 작품을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추정 고인돌'을 바라본다. 지금 가파도는 청보리 축제 기간이다. 꼭 이때가 아니어도 청보리가 황금색으로 변하는 철에 씨알 좋은 자리돔을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15년 4월 15일 촬영, 수평선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최남단 마라도다.

    제주도에 딸린 섬 '서건도'… 물 빠지면 하루 두 번 징검다리 바닷길이 열립니다
    제주도의 부속 섬은 몇 개나 될까? 우도, 비양도, 차귀도, 가파도, 마라도, 범섬, 문섬, 형제섬…. 좀 멀리는 관탈도, 추자도까지. 이 정도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90개나 된다고 한다. 2010년 국토해양부가 만조 때 수면 위로 드러난 면적이 1㎡ 이상 되는 섬을 모두 찾아내니 제주도의 부속 섬이 63개에서 90개로 늘어났다. 그중 '썩은섬'이라는 섬이 있다. 고래가 물 빠진 구덩이에 갇혀 죽어 썩어서 '썩은섬'이라 했다는 설과, 잘 부서지는 응회암으로 이뤄져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음이 변해 '썩은섬→석근섬→서건섬→서건도'로 불리게 됐고, 한자로는 '부도(腐島)'라 한다. 제주판 '모세의 기적' 현장인 이 섬은 물이 빠지면 바닷길이 열린다. 바닷길이 열리면 드러난 검은 돌을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럽게 디디며 섬으로 들어간다. 인생이나 징검다리나 매한가지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조금은 바보스럽고 느린 것이 탈이 없다.

    섬 속의 섬에서 바라보는 섬, 문섬과 쪽빛 바다, 한라산 조망은 여행의 여유를 채우기에 손색이 없다. 이날은 오전엔 4시 55분부터 10시 6분까지, 오후엔 3시 17분부터 10시 29분까지 두 차례 바닷길이 열렸다. 사진 왼쪽 작은 섬이 문섬, 화면에 보이지 않는 오른쪽이 건설 중인 강정항, 2015년 4월 26일 이른 아침에 촬영했다.


    수확 끝낸 보리밭… '보리 추위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 속담이 생각나는 날씨네요
    육지는 요즘 때아닌 더위로 몸살이라고 하는데 남쪽 제주도는 정작 긴팔 옷을 입어도 될 정도다. 제주 속담에 '보리 추위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한다. 보리 수확기인 요즘 밤에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기 때문이다. 보리는 한때 제주 사람들의 주식이나 다름없는 귀한 곡식이었다. 돼지우리에서 거둔 거름에 보리씨앗을 섞어서 주먹 반 정도 크기로 뭉친 뒤 밭에 뿌려놓은 다음, 쟁기로 밭을 가는 방법으로 파종했다고 한다. 11월에 심어서 5월 말이나 6월 초에 수확하는데, 얼마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지 '겨를 없는 보리 수확 때는 장인어른이 와도 엉덩이로 절할 틈도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요즘은 콤바인으로 수확을 하니 혼자서도 넓은 밭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사진은 콤바인으로 수확을 끝낸 보리밭에 이삭을 자르고 난 보릿대를 가지런히 쏟아내 놓은 모습이다. 월동채소의 과잉 생산과 가격 하락으로 재배를 권장하여 작년보다 재배 면적이 2배 이상 늘었다. 보리가 익을 무렵엔 제주 명물 자리돔이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제주시 오라동 방선문 부근에서 2015년 5월 31일 촬영.


    제주 해변의 불청객 '괭생이모자반'… 일본에선 별미로 즐긴다는군요
    제주도의 상가나 잔치 음식에 빠질 수 없는 대표 행사 음식이 몸국이다. 돼지를 잡아 뼈와 내장, 순대를 삶아낸 국물에 말려놓은 모자반을 물에 불려 소금기를 빨아내고, 싹둑싹둑 잘라 넣고 끓인다. 내장과 미역귀를 썰어 넣어야 제맛이고, 잘게 썬 김치와 메밀가루를 풀어 걸쭉하게도 만든다. 이제는 곳곳에 전문음식점이 생겨나 잔칫집이 아니라도 제주 여행자들이 한 번쯤 도전해 볼 수 있는 전통음식이자 건강식이다.

    올봄부터 제주 해안과 한반도 남서쪽 해안에는 모자반과 흡사한 괭생이모자반이라는 골칫덩어리가 떠밀려와 쌓이고 있다. 해류를 타고 중국 남부에서 올라온 불청객이다. 화학비료가 흔치 않았던 예전에는 수거해서 밭에 거름을 했다고 한다.
    일본은 괭생이모자반도 별미로 다양하게 먹고 있다는데 우리도 몸국을 뛰어넘을 요리를 개발해 먹어 치우는 것도 연구해봄 직하다. 다행히 여름철로 접어들면서 좀 뜸하다고 하니 피서철을 앞두고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은 괭생이모자반이 말라서 검은 현무암을 붉게 덮은 제주시 조천읍 해안에서 2015년 5월 26일 촬영.


    ▶조의환은
    197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신문·잡지·출판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과 전용서체 개발과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형 전시의 기획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뉴욕타임즈, 가디언, 조선일보의 편집디자인〉(미디어연구소 2004년), 〈FLUX〉(사진예술 2011년)이 있다. 현재는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사진작업과 전시, 출판기획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