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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부부가 지은 편안한 보리밥

산야초 2016. 8. 14. 21:29

강원도 부부가 지은 편안한 보리밥

    입력 : 2016.04.22 08:00

    [맛난 집 맛난 얘기] 밀과 보리

    청명 곡우 다 지났다. 예전 같으면 서서히 보릿고개가 시작될 무렵이다. 기갈이 감식이라고 했던가. 주리고 목마르면 맛없는 음식이 어디 있으랴! 장리쌀마저 바닥나 옆집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꽁보리밥 삶는 냄새에 침을 삼켰던 계절. 보리밥은 배고팠던 시절의 한이 서린 음식이자 가난의 상징이었다. 그랬던 보리밥이 요즘엔 별식이고 건강식으로 환생했다. 서울 북촌 <밀과 보리>에서는 배고팠던 시절의 그 꿀맛 보리비빔밥을 다시 음미할 수 있다.

    보리밥 먹기 좋은 편안한 공간과 분위기

    산뽕나무 껍질로 금간 부분을 기운 낡아빠진 이남박은 궁기가 흘렀다. 거기에 꽁보리밥을 넣고 고추장으로 쓱쓱 비벼 한 끼를 때웠던 기억. 어떤 이에겐 지겨움이고 어떤 이에겐 아픔이다. 그렇지만 또 어떤 이에겐 아련한 추억이기도 하다.

    <밀과 보리>는 인터넷에 검색해도 잘 안 나오는 조그만 보리비빔밥 집이다. 하지만 추억의 맛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알음알음 찾아온다. 손님 대부분은 식당 인근인 북촌에 사는 주민과 직장인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과 밥을 지어주는 사람간의 친밀도가 퍽 높다.

    밀과 보리 반찬들
    평일 정오가 되면 직장인들이 몰려온다. 이들이 한 차례 왔다 가면 이번엔 북촌의 공방과 갤러리의 주인과 직원들, 동네 주부들이 들어온다. 여유 있고 느긋한 점심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다. 오는 손님마다 고향집 형수나 친정 언니에게 밥을 청하듯 주문을 한다. 주인장 정덕미(48) 이영성(55) 부부가 북촌 사람인데다 이 동네에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오래 얽힌 사람들이 많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진다. 이는 수더분하고 착한 부부의 인상과 함께 공간이 주는 아우라에서 기인한다. 식당 내부는 개조한 한옥이다. 안방-마루-건넌방 일체형 구조의 전형적인 옛 서울 서민가옥 형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천정과 옹색한 공간은 불편함보다 오히려 내 집에 온 듯한 안온함을 준다. 겨울철이나 비 오는 날엔 따뜻한 방바닥이 고맙다. 서울에서 보리밥을 먹기에는 최적의 공간이다.

    천연조미료로 만든 강된장에 보리비빔밥 ‘쓱쓱’

    부부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식당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다니는 성당의 건축 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2년 넘게 밥을 해줬다. 공사가 끝나고 나서도 밥상 차리는 데 이력이 붙었다. 누군가를 위해 계속 밥을 해주고 싶었다. 서로 농담 삼아 ‘식당이나 해볼까’ 했는데 우연치 않게 지금의 자리가 나와 그날로 계약했다.

    처음엔 바지락칼국수 한 가지로 시작해 차츰 메뉴를 늘려 이젠 제법 식당 티가 난다. 바지락칼국수와 함께 식사 메뉴는 보리비빔밥(6000원)과 곤드레밥(2인 1만4000원) 두 가지다. 자리에 앉으면 작은 양은 주전자에 곤드레 나물과 보리를 섞어 끓인 뜨끈한 숭늉부터 내온다.

    보리밥은 충남 부여산 보리를 쌀에 50% 섞어 밥을 지었다. 보리비빔밥에는 표고버섯, 무생채, 부추, 콩나물, 숙주나물, 냉이, 상추, 적근대 등이 들어갔다. 물론 비빔재료들은 늘 바뀐다.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신선한 채소를 구입해 쓰기 때문이다. 여기에 강된장이나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먹는다.

    강된장은 멸치, 버섯, 새우, 마늘 등 천연양념을 갈아 넣고 숙성시킨 것이다. 보통의 강된장과 달리 짠맛이 한결 적고 맛이 순하다. 천연조미료와 구수하게 익은 강된장이 보리밥의 풍미를 한층 높여준다. 시원한 바지락 탕을 함께 내주는데 고추장을 맵게 비벼먹을 때 입가심용으로 안성맞춤이다.

    밀과 보리 한 상
    겉절이와 열무김치는 본시 예전부터 보리밥과 합을 맞춰온 사이다. 예전 아낙들이 들일 하는 남편에게 보리밥을 내갈 때 늘 막걸리와 함께 챙겼던 찬들이다. 매일 담그는 겉절이와 풋풋한 열무김치가 보리밥을 한층 맛깔 나게 해준다. 또한 보리밥 한 술에 곰취 장아찌 한 장 얹어 씹으면 입 안이 오래 향기롭다. 뭔가 위로 받는 느낌이 든다.

    평창의 향기 물씬 나는 곤드레밥

    남편 이씨가 소화력이 떨어져 집에서 먹었던 음식 그대로 차려낸 밥상이어서 조미료를 넣지 않고 만든다. 음식이 전체적으로 간이 세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곤드레밥도 마찬가지. 강원도가 고향인 부부에게 평창의 친구가 보내주는 곤드레 나물이 핵심재료다.

    보리비빔밥보다 나물과 장아찌 등 몇 가지 찬류를 더 보강했다. 밥에서 김이 오르자 넉넉히 넣은 곤드레 나물 향기가 평창의 산향처럼 피어 오른다. 국은 된장국이 나온다. 기호에 따라 양념간장이나 강된장에 비벼먹는다. 아무래도 곤드레밥은 양념간장에 비벼야 제 맛이 난다.

    주문하고 밥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먹는 순감자전(9000원)이나 해물파전(1만2000원)도 기름 냄새가 고소하니 먹음직스럽다. 저녁에는 닭볶음탕이나 보쌈에 전국의 유명 막걸리를 음미해볼 수 있다. 일요일은 쉰다.

    사실 북촌은 조선시대에 뜨르르한 권세가들의 기와집이 즐비했던 길지였다. 그러나 이젠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시 부귀와 빈천은 영원하지 않다. 사람에게도 음식에게도. 보릿고개 앞두고 한 술 뜬 보리비빔밥이 더는 서럽지 않은 이유다.
    <밀과 보리>서울 종로구 창덕궁1길 32

    글 사진 이정훈 음식문화연구자(월간외식경영 외식콘텐츠마케팅연구소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