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조선일보 기자가 본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

산야초 2016. 9. 1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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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송희영 전 주필. photo=ytn 캡처.

오피니언

조선일보 기자가 본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

2016-09-08, 업데이트: 2016-09-08 20:02:24     


세상 일이 생기고 소멸하는 데에는 ‘연기(緣起)’라고 부르는 일종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흔히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부르는 이 연기의 법칙이, 살다보면 정말 있구나 싶을 때가 있다. 송희영(62) 조선일보 전 주필의 경우가 그렇다. 


송희영 조선일보 전 주필은 “2011년 9월 국민세금인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전세기와 고급요트 등 2억원 규모에 달하는 초호화 향응을 받았다”고 지목된 인물이다. 그의 친형인 송희준(64) 이화여대 교수는 전공이 ‘조선’과 무관한 행정학이지만 대우조선해양의 사외이사를 맡았다. 대우조선 사장 교체기였던 2012년엔 사장추천위원장을 맡았다. 송희영 조선일보 전 주필의 부인은 대우조선 선박 명명식에 참석해 도끼로 밧줄을 자르는 영광을 누렸다. 송 전 주필의 조카는 2009년 특채 형식으로 대우조선에 입사해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송 전 주필의 자녀는 금융기업에 입사했다. 이 기업의 오너가 송 전 주필과 같은 광주일고 동문이어서, 입사 배경을 놓고서도 여러 말이 많다. 


이같은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면 송희영 조선일보 전 주필은 △본인 △형 △배우자 △조카 △자녀 등 일가친척을 동원한 ‘송씨 일가(一家) 집단 비리’의 주범이 된다. 


‘부패 언론인’의 표상처럼 된 송희영 조선일보 전 주필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1978년 공채 15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일본 특파원(1990년)→ 경제부 차장(1993년)→ 부장대우(1993년)→ 부장(1995년)→ 부국장대우(1997년)→ 부국장(1999년)→ 워싱턴지국장(2000년)→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장(사장실장, 2001년)→ 편집국장대우(2003년)→ 출판국장(2004년)→ 편집국장(2005년)→ 논설실장(2005년)→ 조선일보 이사(2008년)→ 논설주간(2010년)→ 신문방송편집인협회장(2013년)→ 주필(2014년)로 승진했다. 평균 2년에 한번 꼴에 달하는 초고속 승진이다. 그는 파격적인 인사를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조선일보를 장악해 갔다. 


그가 조선일보를 움켜쥐기 시작하던 1994년 6월, 나는 공채 33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 시기 편집국에는 이른바 ‘송희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것이 있었다. 공식적인 이름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이 모임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조직된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2~5년차 정도의 주니어 기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송빠 모임’이 편집국 안에 있었으며, 당시 일부 기자들이 이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던 것은 사실이다. 


내게도 ‘이 모임에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지금은 조선일보를 떠나 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모 기자로 기억한다. 나와 엇비슷한 또래였던 그는 직접 “송 국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서 “우리는 송 국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가끔씩 모이고 있다.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제안을 받고 망설이다 거부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모임에 속했던 멤버 중 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조선일보에서 근무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송희영 전 주필은 조선일보의 젊은 기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시기 그는 ‘꼰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지금이야 흔히 쓰는 말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꼰대’는 조선일보 기성세대를 통틀어 비하하는 일종의 금기어로 기능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 문화가 철저한 조선일보에서 이런 도발적 표현을 겁없이 내뱉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송희영 전 주필 만은 예외였다. 그는 기라성같은 선배들과 사회의 기득권층을 통틀어 공공연하게 ‘꼰대’라고 비판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뿐 아니라 편집국 야근 때나, 지면 회의 때도 그의 ‘꼰대’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특정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 꼰대가 말이야” 꼰대라서 그래” 같은 말을 거침없이 쏘아댔다. 


그가 경제과학부장을 맡고 있던 1996년말, 조선일보는 당시 상장된 디지틀조선일보 주식을 액면가 5000원씩 계산해 연말상여금 대신 사원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상여금 대신 액면가로 받은 것이니만큼 기자들의 관심은 이 주식의 ‘향후 가치’에 집중됐다. 일부 기자들은 당시 경제과학부장이었던 송희영 전 주필에게 ‘디조’의 보유가치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송희영 전 주필은 뜻밖에도 ‘디조’의 주식 가치를 공개적으로 평가절하했다. 


그는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디조의 경영이 엉망이다. 그래서 회사가 부실하다. 이 회사 주가는 1만원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 올라간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기회가 있을 때 빨리 파는 것이 좋다”고 수차에 걸쳐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 발언의 방점은 “빨리 파는 것이 좋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디조 경영이 엉망”이라는 점에 찍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당시 디지틀조선일보 대표이사를 맡고 있었던 인보길 사장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으로 해석됐다. (“1만원도 가기 어렵다”던 송희영 전 주필 주장과 달리, 디지틀조선일보 주가는 1999년 12월 28일, 최고가 31만원을 기록했다.)


송희영 전 주필이 경영능력을 비판한 인보길 당시 디지틀조선일보 사장은 1988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편집의 대가다. 기사의 맥을 꿰는 제목과 편집으로 독자의 감성을 쥐락펴락했던 그는, 취재부 후배기자들이 놓친 부분을 날카롭게 지적하기로 유명했다. 꼼꼼한 그의 지적 앞에 머쓱해진 취재기자들은 “편집부가 너무 깐깐하다”는 볼멘 소리를 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송희영 전 주필이었다.


송희영 전 주필은 이후 수년간 디지틀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가속화된 그의 비판은 2000년대초 신문을 포함한 조선일보 전체에 대한 구조조정 컨설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초기 ‘디조’를 구성했던 멤버 다수의 퇴사로 연결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시 ‘디조’를 떠나간 초기 멤버들은 퇴사 후인 2005년 보수 성향의 인터넷매체를 설립한다. 이 매체가 최근 ‘송희영 사태’를 주도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뉴데일리’다. 


송희영 전 주필의 이른바 ‘꼰대론’은 서슴없이,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그가 조선일보 간부로서는 이례적으로 노보에 글을 써서, 당대의 논객이었던 김대중 전 주필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조선일보에서 부국장급 후배가 편집국장을 지낸 대선배의 경영능력을 공개 비판한데 이어,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대논객을 다시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사실상 퇴진을 촉구한 사건은 젊은 기자들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젊은 기자들은 송 전 주필의 ‘도전’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송 전 주필은 그런 기자들을 흡수했다.


‘도전’에 따른 후폭풍도 물론 있었다. “자신을 키워준 선배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비판이었다. 조선일보에서는 호남 출신으로 광주일고~서울대를 졸업한 송희영 기자를 ‘잘 봐준’ 사람의 하나로, 같은 호남 출신인 김대중 전 주필이 꼽힌다. 일부 기자들은 훗날 송희영 전 주필의 행보를 정동영 의원의 행보에 비유하기도 했다. 정동영 의원은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시 ‘최고 실세’로 꼽혔던 권노갑 상임고문에게 “물러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른바 ‘정풍파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개인적 야망을 위해 자신을 키워준 은인을 배신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자기를 키워준 사람을 차례로 밟고 오르며, 정치적 야심을 강화했다”는 비판이었다.


‘김대중 공개비판’으로 인해 송희영 전 주필은 한동안 필화(筆禍)를 겪었다. 2000년 5월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자리를 만들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2001년 돌아온 뒤, 후배 기자들과 가진 식사 자리에서 “그 일 때문에 회사에서 잘릴 뻔 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송 전 주필은 선배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출판국장을 맡고 있던 2004년 11월, 보수 논객의 대부로 꼽히는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대표가 ‘이론 무장을 위한 대강연회’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했다. 그러자 송희영 전 주필이 칼럼을 써서 “체육관으로 몰려다니며 구국(救國)을 외치고 박정희를 갈망하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면서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추진했던 우파혁명을 꿈꾸는 극단”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이 시기는 우리 사회가 보수-진보의 이분법으로 갈라지면서, 이른바 ‘안티조선’의 조선일보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던 때였다.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보수 일변도의 보도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같은 일련의 배경에서 단계적으로 전개된 송희영 전 주필의 ‘꼰대론’은 과거에 대한 비판이자 차기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고, 동시에 조선일보의 젊은 기자들을 겨냥한 포퓰리즘으로 해석됐다. 


송희영 전 주필은 ‘방일영 장학회’ 출신으로, 고 방우영 회장으로부터 ‘똘똘이’란 별명을 얻을만큼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이같은 신임을 바탕으로 ‘꼰대론’을 펼치며, 과감하게 선배들을 제치고 돌진했다. ‘그가 조만간 편집국장이 되리라’는 전망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당시 조선일보에서 찾기 어려웠다.


조선일보는 2004년 8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12주간 미국의 신문경영 전문 컨설팅사인 ‘부즈알렌해밀턴(Booz Allen Hamilton)’에 의뢰해 조직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받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경영기획실(사장실)을 중심으로 각 부에서 11명을 차출해 일종의 ‘TF팀’을 조직했다. 앞서 언급한 ‘송빠’ 멤버의 일부가 이 TF팀에 합류했다. 


예상대로 송희영 전 주필은 2005년 3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 시기를 전후해 조선일보 편집국에는 “회사가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더라”는 풍문이 돌았다. 회사는 “신문 업계에 불어닥친 위기 상황에 대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 지를 찾아보기 위해 경영 컨설팅에 들어간 것”이라며 “구조조정이나 감원과 같은 목적에서 하는 것은 아니나 동요할 필요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1년 뒤인 2005년 12월, 풍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그해 12월 23일이었다. 조선일보는 이날 “10년차 이상인 편집국원 전체’를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라 불리는 느닷없는 이 구조조정을 단행한 사람이 송희영 당시 편집국장이다. 그는 “올해 광고 상황이 예상보다 좋아졌다. 그 덕에 지금은 회사에 돈이 있다”면서 “12월 31일까지 나가라”고 말했다. “흑자 상황이기 때문에 명예퇴직을 실시한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송희영 당시 편집국장은 “솔직히 고참 기수들에게는 (명퇴를) 권장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명예퇴직이 실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일부 부서의 경우엔 명퇴의 기회도 없이 분사가 이뤄졌다”면서 “명퇴도 없이 분사를 해서 월급도 줄어드는 사태를 맞느니, 기회가 있을 때 명퇴를 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느닷없이 명퇴를 실시한데 대해 그는 “미리 고지를 하면 고문하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라며 “이런 것은 어느날 결심하고 하는 것이 더 낫다. 미리 고지하면 조직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고통스러워진다”고 주장했다. 


당시 명예퇴직 대상으로 지목된 기자는 한 둘이 아니었다. 명퇴 기준이 ‘10년차 이상 전원 대상’으로, 매우 포괄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월급 많은 순서’로 이를 해석했다. 편집-사진-지방취재본부를 중심으로 수십명의 고참들이 단계적으로 회사를 떠나거나 계약직으로 신분이 전환됐다. 하지만 기자들의 저항은 소극적이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승진을 거듭하며 선후배들을 밀치고 나가는 송희영 전 주필의 위세 앞에서, 수많은 기자들이 목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했다. 


수십년 청춘을 바친 직장을 떠나면서 ‘마지막 취재카드’로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고 간 선배가 있었다. 그는 “돈 많이 벌어서 그랜저 타고 오겠다”고 했다. “계약직이라도 좋으니 일자리를 달라”고 사정한 선배도 있었다. 구석진 곳을 찾아가 혼자 눈물 흘린 선배들은 많았다. 그러나 “일방적 명예퇴직이 부당하다”고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선배는 없었다. 


일부 선배들은 “해고 사유라도 알려달라”면서 송희영 편집국장을 찾아갔다. 당시 편집국 분위기에서는 그나마 이게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송희영 편집국장은 국장실에서 ‘스윙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찾아온 후배기자들에게 그는 “네가 왜 왔어? 너는 아니야. 나가 봐”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 골프채를 계속 휘둘렀다.


이 사태로 조선일보를 떠난 사람 중에 N씨가 있었다. 그는 퇴사 후 “사업을 하겠다”며 친구와 동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고, 그는 생계를 걱정하면서 방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그의 시신을 어린 딸이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자들은 일방적인 구조조정과 송희영 편집국장의 냉혹함을 비난했다. 하지만 비난은 술자리에서만 이뤄졌을 뿐이었다. 송희영 편집국장은 조선일보 논설실장, 이사를 거쳐 2014년 주필로 승진했다.


송희영 조선일보 전 주필의 ‘골프 스윙’은 11년 뒤인 2016년 8월,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송희영 조선일보 전 주필이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전세기와 호화 요트 대접을 받고, 런던의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가졌다”는 김진태 의원의 폭로가 나온 것이다. 당시 송희영 전 주필이 접대를 받았다는 런던의 ‘웬트워스(Wentworth) 클럽’은 영국을 대표하는 명문 골프장으로 알려진 명소다. 이곳에서 스윙을 즐기면서 그는 11년 전 있었던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떠올렸을까? 


당시의 구조조정에 대해 “더 나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시각도 조선일보 내에 존재한다. 그러나 11년 뒤인 2016년, 송희영 전 주필은 상상을 초월하는 접대의 당사자로 드러나, 기자들 전체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 그가 선배들을 제치고 후배들을 꺾으며 냉혹하게 돌진한 것이 진정 '더  나은 신문'을 위한 행위였을까? 


나는 송희영 조선일보 전 주필이 이 글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길 바란다. “이 세상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기로 했다. 


이범진. 조선일보 18대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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