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빛에 둥근 모양새 ‘백진주’ 쌀의 차진 식감은 ‘예술의 경지’
상설 구시장, 입구 90년 된 떡집·불맛 나는 ‘중화 비빔밥’ 못 잊어
축제 때 ‘문어’ 소량 판매 안 돼 아쉬워…신시장은 2일·7일 ‘장날’
2019년 284번째 해와 달이 뜬 가을날 경북 안동에 갔다. 의성이나 영덕을 가기 위해 잠시 머물거나 지나쳤던 안동. 오롯이 안동을 맛보기 위해 가는 것은 10년 만이다. 안동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하회마을 가는 길에 있던 된장 공장이었다. 3년, 5년 묵은 숙된장을 생산하는 곳으로 2007년 즈음 봤던 넓은 장독대의 풍경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묵은 된장 파는 곳이 많지만 그즈음엔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안동 하면 생각나는 대표 먹거리도 시나브로 바뀌었다.
■ 내륙 안동에서 나는 ‘진주’
간고등어, 찜닭은 안동을 대표하는 먹거리다. 헛제삿밥이나 건진국수도 빠지면 섭섭한 것들이다. 안동은 참마와 사과도 유명하다. 필자는 다른 것보다 내륙 지방인 안동에서 나는 ‘진주’를 맨 처음으로 꼽는다. 안동에서 나는 진주는 차진 식감이 예술의 경지다. 바다의 조개가 보석 진주를 만들어 낸다면 안동은 논에서 ‘백진주’를 만든다. 백진주는 2001년 등록한 쌀 품종이다. 일품, 삼광, 영호진미처럼 한자 뜻을 찾아봐야 하는 다른 쌀 이름과 달리 뽀얀 빛이 나는 둥그런 진주 모양새여서 백진주라 이름 지었다. 명소를 소개할 때 ‘동양의 진주 ○○, 남해의 숨은 진주 같은 풍경’ 등의 말을 흔히 쓴다. 백진주는 쌀 모양새뿐만 아니라 맛도 백미 중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품종이다.
차진 맛이 좋다고 알려진 일본 품종 고시히카리의 아밀로스 함량은 16~17%다. 백진주는 그보다 훨씬 적은 9% 내외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밥쌀 중에서 아밀로스 함량이 가장 적기에 밥이 차지고, 밥이 식어도 쉬이 굳지 않고 원래 식감을 유지한다. 백진주의 장점이 빛을 발하는 것은 현미로 먹을 때다. 다른 현미와 달리 차진 식감이 있어 껄끄러운 식감 때문에 현미를 멀리하는 이도 백진주로 지은 현미밥은 편하게 먹을 수 있다. 건강을 위해 현미식을 해야 하는 이라면 메모 필수다. 안동농협 경이로운 몰(www.nhwondermall.com)
안동에는 여러 시장이 있지만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구시장과 신시장이다. 구시장은 안동 문화거리와 붙어 있고 찜닭 골목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구시장은 따로 오일장이 열리지 않지만 신시장은 2일과 7일에 장이 선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을 둘러싸듯 대로변 인도와 골목, 길 건너 시장 주차장 공터에 사람과 농산물이 가득했다.
제철로 들어선 생강, 사과, 콩, 감, 밤, 대추, 총각무까지, 어서 지갑 열라는 유혹을 사방팔방에서 받았다. “어서 와, 안동 오일장은 처음이지?” 쉴 새 없이 말 건네는 유혹에 결국은 토란대 말린 것에 걸려들었다.
시장에 가장 많은 것이 토란대였다. 토란대는 세 가지 버전으로 팔렸다. 아무런 손질을 안 한 것, 편한 것을 찾는 이를 위해 손질한 것, 그리고 말린 것 세 가지가 있었다. 청송에서 아침 일찍 온 부부가 파는 토란대는 길쭉길쭉한 개량 토란과 달리 더디 자라고 대가 짧은 재래 토란대라고 하는 말에 바로 샀다. 토종이라고 해서, 구수한 맛이 좋아서 산 것만은 아니다.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게 말린 것이라 샀다. 토란대는 나물로 해도 맛있지만 육개장을 끓일 때 소고기처럼 빠져서는 안되는 재료다. 얼큰한 소고깃국을 끓일 때 넣어도 좋고, 인스턴트 육개장을 끓일 때도 토란대를 더하면 한층 씹는 맛이 좋아진다.
■ 찜닭 아니죠, ‘쪼림닭’ 맞습니다!
구시장에 찜닭 골목이 있다면 신시장에는 문어 골목이 있다. 문어에서 문은 글월 문(文)을 쓴다. 한자 덕에 양반의 물고기라는 해석을 많이 한다. 양반의 물고기가 맞긴 맞다. 교통이 좋지 않던 시절에 동해안의 문어를 먹을 수 있는 신분은 양반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반의 물고기든 아니든 10월이면 문어축제를 열 만큼 안동 문어는 맛있고 유명하다. 그런데 시장 곳곳에 문어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도 정작 문어 한 점 편히 먹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1㎏ 단위의 판매 가격만 할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문어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나 시장을 돌았다. 몇 바퀴 돌다 보니 산 너머 영덕 영해장이 생각났다. 영해시장 안에는 가자미회 파는 곳이 모여 있다. 회를 사서 시장 안 식당에서 일정 금액만 내면 밥과 함께 먹을 수 있었다. 식당마다 안내 문구가 있어 초행자라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안동시장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로 메뉴 개발할 필요 없이 보리밥 식당에서 보리밥과 문어 숙회를 같이 먹어도 좋을 듯싶은데 없었다. 문어 홍보를 위해 축제를 여는 것보다는 문어를 편히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게 더 먼저 아닌가 생각했다. 안동농협에서 산 백진주와 문어 숙회가 어울릴 듯싶어 삶은 문어를 샀다. 백진주는 오일장 당일날 판매를 시작한 2019년 ‘신상’이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이 가을에 가장 맛있는 것은 쌀이다. 동해수산문어(054-841-4025)
안동찜닭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2000년 전후로 프랜차이즈 점포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며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유행은 사그라들었지만 배달 음식에서 족발이나 수육만큼 빠지면 섭섭할 메뉴이기도 하다. 안동찜닭은 매콤하고 달콤한 간장소스를 흠뻑 머금은 당면을 밥과 함께 먹어야 맛있다. 안동찜닭에서 당면을 뺀다면? 무슨 맛으로 먹나 싶지만 기대 이상이다. 안동에선 일명 ‘쪼림닭’으로 부른다. 찜닭을 조금 더 졸여서 국물 없이 만든 음식이다. 찜닭과 생김새가 다르지만 젓가락을 부르는 매력은 같다. 오히려 한 수 위다. 달콤한 소스를 즐기다가 목 넘길 즈음 건고추에서 나는 묵직하고 칼칼한 매운맛이 슬쩍 나고는 이내 사라진다. ‘채소 지옥, 고기 천국’을 외치는 고기 성애자들에게 딱 맞는 메뉴다. 접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감자와 떡 조금에 나머지는 닭고기다. 반찬도 별거 없다. 식초에 절인 무가 전부다. 공깃밥을 시키면 김치는 준다. 효자통닭(054-853-8890)
■ 통멸치로 차갑게, 은어는 매콤하게
국물 멸치의 내장과 대가리를 따야 깔끔한 국물이 난다고 아는 이들이 많다. 1980년대까지는 그 말이 맞았다. 쪄서 말려도 멸치에 많은 지방 성분 때문에 쉽게 찌든 냄새가 났다. 냄새가 더 나는 대가리와 내장을 빼내야 국물을 낼 수 있었다. 냄새가 심해서 내장 제거를 ‘똥 뺀다’ 표현했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굳이 수고롭게 내장을 뺄 필요가 없다. 만드는 과정은 같아도 보관을 냉동고에 하기 때문에 냄새가 나지 않는다. 멸치 그대로 육수를 내도 감칠맛이 더 나지 덜 나지는 않는다. 안동 신시장 근처의 우동집은 멸치를 통으로 끓인 육수가 자랑인 곳이다. 멸치 육수를 차갑게 해서 내는 냉우동이 대표 메뉴다. 우동에 짜장과 매운 비빔소스를 넣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냉우동을 찾는다. 멸치만으로 낸 육수는 멸치 비린내는 없고 감칠맛만 있다. 시원한 온도와 감칠맛에 육수가 끝없이 들어간다. 애주가의 아침을 깨우는 해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신시장의 선짓국밥과 냉우동 둘 중 하나를 해장으로 선택하라면 필자는 냉우동이다. 다만 해장이라면 우동면의 양을 적게 먹는 게 정신과 위장에 평화를 줄 듯싶다. 신선식당(054-853-7790)
수박 향이 나는 민물고기는? 정답은 은어다. 사실 은어에서 수박 향이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민물고기 특유의 흙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은어는 회, 밥, 튀김, 구이, 조림 등 다양하게 먹는다. 탕이 대부분인 다른 민물 생선과 달리 다양한 음식으로 낼 수 있다는 게 은어의 장점이다. 낙동강 상류의 안동은 예로부터 은어가 유명했다. 댐과 하구언이 생기면서 맛있던 은어가 사라졌다. 은어는 사라졌어도 음식의 명맥은 끊이지 않았다. 안동 시내에 은어 조림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있다. 안동이 아닌 하동에서 가져오는 은어지만 음식의 형태는 안동식이다. 안동에서 나는 질 좋은 고춧가루를 듬뿍 사용해 은어를 조린다. 고춧가루가 은어를 덮고 있는 모양새로 음식이 나온다. 덮고 있는 양념을 걷어내고 살과 함께 먹으면 고소한 은어 살과 매콤한 양념이 입안에서 합창하듯 밥을 부른다. 은어 뼈는 연하기에 따로 발라낼 필요가 없다. 뼈째 씹으면 된다. 후식으로 구수한 누룽지가 나온다. 인원에 맞게 솥밥을 짓기 때문에 가능한 후식이다. 물고기식당(054-859-2673)
■ 90년 동안 쳐댄 찰떡
찜닭이나 ‘쪼림닭’, 은어 조림보다 매력적인 메뉴가 중화 비빔밥이다. 재료를 불맛 나게 볶는 과정은 짬뽕 만드는 것과 같지만 육수를 넣지 않고 그대로 낸다. 볶은 재료 위에 달걀부침 하나 얹은 모양새지만 상당히 맛있다. 웍에 불맛 나게 볶는 것들이 흰밥하고 잘 어울렸다. 짬뽕밥하고는 또 다른 맛이다. 공깃밥을 통째로 넣고 비빔밥 비비듯 먹어도 좋지만 그보다는 조금씩 비벼 먹는 게 더 맛있다. 조금 맵다 싶으면 따로 나온 계란국이 제격이다. 떠먹는 순간 제 역할을 한다. 숟가락을 들고 국과 밥을 오가다 보면 한 그릇 뚝딱이다. 단무지에 젓가락 갈 틈이 없다. 서울식당(054-858-1597)
안동 구시장 입구 왼쪽에는 90년 된 떡집이 있다. 매일 찰떡을 떡메로 친다. 기계로 치면 편하지만 차지게 씹히고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찰기는 낼 수 없다고 한다. 찰떡에 묻히는 재료는 팥, 콩, 깨 세 가지다. 깨만 중국산을 사용하고 팥과 콩은 국내산을 쓴다. 갓 만든 음식은 다 맛있다. 식은 붕어빵보다는 호호 불며 먹는 뜨끈한 붕어빵이 더 맛있다. 떡도 마찬가지다. 아침 일찍 떡메로 친 떡에 팥, 콩, 참깨 등의 고물을 묻힌 떡은 갓 만든 붕어빵처럼 맛있다. 점심 먹기 전에 가야 가장 맛있는 떡을 맛볼 수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떡집도 일찍 가야 가장 맛있는 떡을 먹는다. 벙어리찰떡(054-855-8786)
안동에 가면 으레 먹어야 한다는 것들을 빼고도 1박2일 동안 잘 먹었다. 구시장을 비롯해 식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에 안동역 주변에 숙소를 잡았다. 단풍철이 다가왔다. 단풍색이 진해지면 식재료의 순수한 단맛도 같이 진해진다. 여름과 달리 가을은 눈과 입이 모두 즐겁다. 여행 가기 딱 좋은 계절이다.
제철 식재료를 찾아 매주 길 떠나다 보니 달린 거리가 60만㎞. 역마살 ‘만렙’의 24년차 식품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