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10.22 14:15
카라콜~텔레티 패스 거쳐 에메랄드빛 고산 호수 아라쿨까지 55㎞ 걸어
천산산맥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 4개국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맥으로 아시아의 알프스이다.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로 덮여 있고 최고봉인 포베다산Pobeda Mt(7,435m)의 남쪽으로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이 이어진다. 키르기스스탄Kyrgyzstan은 국토의 약 90%가 천산산맥과 그 지맥으로 이루어져 있어 천산산맥을 빼놓고서는 키르기스스탄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이번 천산산맥 백패킹은 키르기스스탄 카라콜Karakol에서 시작해 텔레티 패스Telety Pass, 아라쿨Ala-Kul호수를 거쳐 아라쿨 피크, 알틴 아라샨Altyn Arashan까지 이르는 약 55km의 여정이다.
호텔로 픽업하러 온 차량은 놀랍게도 군 트럭. 마치 영화 세트장에라도 온 듯한 느낌이다. 시작부터 기분이 고조된다. 제티 오구즈Jety oguz계곡으로 향하는 울퉁불퉁한 진흙길. 어찌나 흔들리는지 쉐이크 통 안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한국의 산과는 다르게 시원스럽고 광활하게 펼쳐진 모습에 모두들 환호성이다. 가끔 지나가는 꼬마 마부들. 마치 놀이공원에서 말놀이를 즐기듯이 자신만만하게 말의 옆구리를 차면서 신나게 질주하는 모습은 귀엽다기보다는 놀랍다. 고산의 위용을 자랑하듯 구름은 빠른 속도로 흐른다.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검은 구름이 뒤덮이고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뜨거운 햇살 대신에 살짝 구름이 덮여 있을 때가 걷기에는 한결 편하다.
야생의 땅으로 들어서다
텔레티 패스가 보이면서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내일은 저곳을 통과하겠지. 설산을 향해 걸으니 조금씩 지쳐가던 산우들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진다. 만년설로 둘러싸인 산을 처음 볼 때 느낌은 흥분을 넘어서 전율이다. 자주 보아도 또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이 설산이다.
맛있는 저녁 식사에 이어진 후식은 수박. 해발고도 3,000m에서 수박이라니? 상상불가이다. 딱 한번 콜롬비아의 잃어버린 도시 정글트레킹에서 먹었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았었다. 달콤한 수박물이 입안에 가득 퍼지니 온몸이 행복으로 물든다.
무척이나 긴장한 고산에서의 첫날밤이 지났다. 아침식사 시간에 몇 사람이 고소증세가 있다고 했지만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오늘 산행 거리는 길지 않지만 해발고도 3,800m까지 올라갔다가 2,500m까지 떨어지니 고산이 처음인 사람에게는 한마디로 지옥을 경험하는 날이기도 하다. 고소도 걱정이고 오르막길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하니 체력안배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보기에도 숨차고 가파른 오르막길.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는데 모두들 긴장한 빛이 얼굴에 가득하다. 조금 오른 뒤 뒤돌아보고 쉬다가 다시 오르기를 두어 번 했을까? 캔디님이 너무 쳐져 있다. ‘어제 고소로 고생했는데 아직 컨디션이 제자리로 안 왔구나’ 생각하는 사이 걱정하던 일이 생긴다. 캔디님이 더 이상 산행을 못 하겠다며 하산을 한단다. 하산을 결정한 이를 위로할 말이 없다. 더욱 팽팽한 긴장감만 맴돌 뿐.
카라콜계곡(3,800m)까지는 최대한 쉬엄쉬엄 오른다. 짧지만 빙하구간도 건넜다. 영화 세트장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산이 햇살에 빛난다. 그곳엔 에델바이스가 지천이다. 저만치 정상이 보이는데 마지막은 걷기조차 힘든 너덜길.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계곡을 넘어서면 소나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어렵사리 3,800m를 올랐다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예상대로 비바람이 몰아친다. 이끼가 뒤덮인 돌길은 빗물이 흐르니 더욱 미끄럽다. 뭐하나 좋은 상황이 없다. 각자 조심스럽게 두 발을 응시하고 한발 한발 내딛는 데만 집중한다. 돌길이 끝 날쯤에서야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해 초록의 평원에 햇살이 들어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밝게 웃는다. 하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2,500m에 가까워지니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침엽수가 가득한 숲이 펼쳐진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피로가 사라진다.
어제 텐트를 치면서 소똥을 피하고 싶었지만 온 천지가 소똥이라서 피할 재간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텐트 밖으로 나오니 어제보다 더 많은 똥이 반긴다.
토르Tor협곡을 따라 가는 길은 거의 평탄해서 마치 평원처럼 시원하다. 오전이라 날씨도 덥지 않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시작은 순조롭다. 이끼가 가득한 습지에는 야생화도 가득하다. 폭신한 쿠션만큼이나 마음도 푸근해진다.
텔레티 패스(3,800m)를 넘고 은하수와 조우
밀란 캠프 근처에서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한 후 계곡을 따라 오르니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작은 돌들이 뒹구는 오르막길. 비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친다. 모두들 말이 없다. 비가 우박으로 변하더니 손이며 얼굴을 때린다. “우박이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어?” 하겠지만 진짜 따갑게 아프다. 우박으로 변할 만큼 추운 날씨이지만 배낭 메고 올라가는 길은 추위를 느낄 사이도 없다. 계곡에 올라서니 바로 아래에 아라쿨호수가 에메랄드빛을 반짝이며 그 위용을 드러낸다. 날이 맑았다면 보석처럼 빛났을 텐데. 먼저 도착한 산우들이 호수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 보세요!” 외치니 모두들 손을 들어 준다. 호수와 산우들의 사진을 담으면서 부자가 된 느낌이다.
지난 이틀 동안 밤이면 곯아떨어져 자느라 별도 은하수도 만나지 못했다. 밤 10시 30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뜨고 텐트에서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어~”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온통 별천지. 산자락에서 하늘로 치솟은 은하수. 잠시 생각이 멈춘다. 랜턴 빛으로 초점을 잡고 배낭에 카메라를 올리고 연속으로 셔터를 누른다. 삼각대도 광각렌즈도 없어서 아쉽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보랏빛에서 푸른빛으로 은하수 색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별만 가득한 세상으로 변한다. 길게 우주까지 뻗어 있어서 영원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완벽한 데칼코마니, 아라쿨호수
전날 밤 은하수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두근거리는 마음을 꼭 잡고서 아라쿨호수로 간다. 예상대로 호수 물에 비친 산의 모습은 한 폭의 유화이다. 피크로 오를수록 맑은 물에 투영된 산 그림자의 모습은 합체가 된 데칼코마니이다. 우리가 사진 찍으러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물결의 움직임조차 없다. 마치 기도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엄숙함마저 느낀다.
호수 옆으로 올라가는 길. 배낭이 무거워도 모두들 발걸음이 가볍다. 호수 왼쪽에 숨어 있던 빙하도 보이고 빙하가 녹아서 내려오는 계곡도 너무 사랑스럽다. 아라쿨 피크로 오르는 길은 이번 일정 중 가장 힘들었다. 경사도가 무척 심하고 돌길이 미끄럽기까지 하다. 들이쉬고 내쉬기를 최대한 천천히 하면서 한발 한발 옮긴다. 몇 사람은 고소로 힘들어한다. 대장님이 고산증세를 보이는 산우를 먼저 걷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최대한 그들과 거리를 두고 걷게 했다.
아라쿨 피크(3,860m)에 올라서니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름모꼴 비슷한 모습의 호수를 둘러싼 암벽은 마치 호수를 보호하는 것 같다. 장엄한 자연의 모습에 감탄하면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다. 이곳에 오르기 위해 산에서 보낸 세 번의 밤, 지나온 시간, 걸어 온 길의 모습이 스쳐간다. 쉬운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한다.
하산 길은 오르는 길보다 더 험하다.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된다. 조금 덜 미끄러운 루트로 하산코스를 선택했지만 밟을 때마다 눈처럼 미끄러진다. 마치 스키를 타듯이 지그재그로 심호흡을 하면서 미끄러운 너덜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미끄러운 길의 끝에는 작지만 빙하가 있다.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라 할까? 험한 길을 내려 온 이들마다 빙하에 올라서며 긴장감을 풀어놓는다. 내려오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쾌감도 즐긴다. 사람 마음은 조금 못된 구석이 있나보다.
켈다이크Keldike계곡은 초록의 평원이다. 조금 전까지 숨 가쁘게 걸었던 길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모두들 피크닉 온 사람들처럼 몸놀림이 경쾌하다. 소똥을 보아도 말똥을 보아도 마음이 여유롭다. 이젠 트레킹의 끝자락임을 실감한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익은 사람이 앞에 서 있다. 캔디님!!! 둘째 날 아침에 하산했는데, 홀로 이틀을 보내고 오늘 당일 트레킹으로 아라쿨호수로 오르고 있었다. 마음 한켠이 찜찜했었는데 밝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저녁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캔디님은 아라쿨호수로, 우리는 알틴아라샨캠프를 향해서 길을 간다.
저만치 계곡이 끝나면 오늘의 산행도 끝날 거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모든 길은 끝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끝없이 이어진 계곡은 8km 이상을 걷고 나서야 끝이 났다. 드디어 알틴아라샨의 캠프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3,900m 아라쿨 피크에서 내려다 본 에메랄드빛 아라쿨호수의 장엄한 아름다움, 천산산맥이 만들어 준 거대한 계곡, 파노라마로 펼쳐진 만년설산, 밤하늘의 별바다를 장식했던 은하수는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걸었던 고난의 시간들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경이롭고 신비한 자연과 함께했던 시간은 그리움으로 언제나 마음 한켠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