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4.22 09:40
잉카 트레일보다 싸고 난이도 높은 '살칸타이 트레킹'…4,600m까지 올라 고산증 오기도
세계에서 가장 긴 안데스산맥은 남아메리카 대륙 서부에 7,00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베네수엘라까지 총 7개국을 통과한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매력을 지닌다. 가장 인기 있는 코스 중 하나가 페루의 마추픽추를 지나는 코스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자 ‘잉카문명의 꽃’, ‘잃어버린 공중도시’라 불리는 마추픽추는 모든 세계인들에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히고 있다.
대중교통을 타고도 마추픽추로 갈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4~5일 정도 소요되는 트레킹을 선호한다. 페루의 자연을 만끽하며 숨어 있는 비경을 찾아가는 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 트레킹 코스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대중화된 것은 크게 3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가장 유명한 잉카 트레일이며, 두 번째는 산악자전거, 짚라인 등 액티비티가 포함된 잉카 정글 트레일, 마지막 세 번째가 해발고도 4,620m의 살칸타이 패스Salcantay pass를 지나는 살칸타이 트레킹이다.
이번 여행에서 걸어본 곳은 살칸타이 트레킹 코스다. 처음에는 잉카 트레일을 걷고 싶었지만 최소 몇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하고, 살칸타이 트레킹에 비해 가격도 400달러 이상 비싸 포기했다. 액티비티보다는 걷는 것이 더 좋기에 잉카 정글 트레일도 제외했다.
트레킹 기점인 쿠스코에는 여행사들이 많았다. 일단 여러 군데 들러 가격을 비교해 보니 가장 싼 곳은 170달러, 가장 비싼 곳은 450달러를 불렀다. 대부분 4박5일 일정이었다. 여자친구인 은진은 트레킹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겠다고 했다.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미안한 마음에 3박4일 일정을 택했다. 3박4일이나 4박5일이나 가격 차이는 없었다. 여자친구와는 3일 뒤 마추픽추 아래의 마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에서 만나기로 했다.
트레킹 첫째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배낭을 메고 출발 장소인 쿠스코 광장으로 향했다. 마추픽추의 높은 명성을 증명하듯 우기라 비수기임에도 광장에는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곧 잇따라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가이드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 모았다. 이윽고 나의 이름이 호명돼 버스에 올랐다. 내심 한국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동양인 자체가 나 혼자뿐이고 전부 흰 피부의 서양인들이었다.
버스 창가에 기대어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무언가 분주한 소리에 깨보니 몰레파타Molepata다.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트레킹 기점으로 간단다. 아침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30분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처음 마주한 안데스는 우기라 산 중에 옅게 구름이 드리워져 있어 운치가 있었다. 요리사와 마부는 나귀에 짐을 싣고 먼저 출발했다. 산행 인원이 20명이 넘는지라 팀을 2개로 나눠야 했다. 우리 팀 가이드의 이름은 ‘수세모’로 첫인상이 선해 보여서 좋았다. 팀 이름은 파차마마(케추아어로 ‘대지의 어머니’란 뜻)로 정하고 간단히 일정을 설명한 뒤 길을 나섰다.
에메랄드빛 호수 우만타이 코차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날씨는 계속 흐렸다. 파란 하늘 아래 안데스 산맥을 볼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태양빛이 없어 걷기는 좋았다. 한 번 휴식을 취하며 3시간을 걸으니 숙소인 소라이팜파Soraypampa가 보였다. 멀리서 볼 땐 숙소 지붕이 짚으로 되어 있어 허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장판도 깔려 있고 침구도 깨끗했다. 먼저 도착한 요리사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으며 합석한 사람들과 몇 마디도 나눠봤다.
점심 이후에는 희망자에 한해서 인근 호수인 우만타이 코차Humantay Cocha를 보러 가기로 했다. 트레킹 첫째 날인지라 모두 체력이 온전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호수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완만했으나 갑자기 가팔라지기 시작해 한 명, 두 명 처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오르자 느닷없이 넓게 펼쳐진 에메랄드빛 호수가 나타났다. 너무나 맑고 잔잔해 바라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됐다. 동행들은 호숫가를 맴돌며 최적의 촬영 각도를 찾아 추억을 남기기 바빴다.
가뿐했던 첫 날 일정과는 다르게 둘째 날은 힘든 노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레킹 중 가장 높은 살칸타이 패스를 넘어야 했으며, 총 이동거리는 20km가 넘었다.
출발부터 수세모는 오늘 가야 할 길이 머니 서두르자며 일행들을 다독였다. 처음에는 평탄한 길이라 속도를 냈으나 어느새 가팔라지더니 비까지 더해졌다. 빗줄기가 굵어져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하자 점차 처지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수세모는 행렬 뒤에 처진 사람들을 보살피고, 앞서 가는 사람들은 간격이 너무 벌어지지 않게 속도를 조절하며 조금씩 나아갔다.
피스코 한 잔으로 날린 추위
어느덧 해발고도 4,000m를 넘기자 고산증이 생겨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걸음의 속도를 줄였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자꾸만 휴대폰을 꺼내 남은 거리를 확인하게 됐다. 좀처럼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걸 재확인할수록 더 힘들다는 걸 알지만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았다.
한 발 한 발 힘주어 조금씩 오르다보니 어느덧 코스 중 최고 높이인 살칸타이 패스 정상이다. 아쉽게도 구름이 잔뜩 껴 살칸타이봉(6,200m)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자 나머지 팀원이 모두 올라왔다. 수세모는 센스 있게 페루 전통술인 피스코를 한 잔씩 돌렸다. 한 잔 받아 마시자 몸에 돌던 한기가 단번에 날아갔다. 그러나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내 움직여야 했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해질 때면 수세모가 “점심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며 일행들의 기운을 북돋아줬다.
간신히 점심이 차려진 산장에 도착했다. 항상 우리보다 먼저 앞서가서 미리 식사를 준비해 주는 요리사 아저씨와 젊은 마부 친구가 너무나 고마웠다. 수세모는 자신도 마부 출신인데 돈을 모아 공부해서 가이드가 된 거라고 했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걸어서 그런지 식사 전에 주는 수프의 온기가 참 좋았다.
모두들 허기졌는지 밥을 2~3그릇씩 거하게 먹어치우는 동안 다행히 비가 완전히 그쳤다. 이제 남은 거리는 8km.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오늘의 숙소가 있는 차우야이Chaullay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다만 마을 안은 하루 종일 내린 비로 흙과 당나귀 똥이 섞인 진창 투성이였다. 신발이나 바지에 잔뜩 묻었지만 그래도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너그러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며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산 중 마을이라 술값이 비싼 편이었지만 모두 힘든 일정을 끝냈다는 성취감에 기분이 좋았는지 주머니에서 술술 돈을 꺼냈다. 팀원들과 ‘해본 적 있다, 없다’라는 진실게임을 하며 서로 최악의 실수담을 공유했다. 팀원들과 친해질수록 트레킹이 이틀 뒤면 끝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었다. 역시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길이 좋은 길이다.
페루 정글의 작은 적, 흡혈파리
살칸타이 트레킹은 3박4일 일정으로 걷는 팀과 4박5일 팀이 함께 출발한다. 그러다 3박4일팀은 사우아이코Sahuayco까지 걷고 거기서 차량으로 하이드로 일렉트리카Hidro Electrica까지 간 뒤, 마추픽추 아랫마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까지 다시 걸어간다. 4박5일 팀은 산타 테레사Santa Teresa에서 하룻밤 더 묵은 뒤, 그 다음날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까지 간다. 이에 따라 두 팀은 3일차 점심 식사장소인 사우아이코에서 이별하게 된다.
살칸타이 트레킹은 3일차의 풍경이 가장 수려하다. 거대한 산과 산이 만드는 깊은 계곡에 흐르는 강력한 물줄기가 마음을 정화시켜 주었다. 트레킹 코스는 계속 계곡을 끼고 이어졌다. 물이 워낙 맑아 목이 마를 때면 그냥 근처에 흐르는 계곡물을 마시면 됐다. 수세모는 쿠스코에서 출발하는 트레킹 코스는 10가지가 넘는다고 알려 주었다.
맥주 파티 이후 팀원들과 한층 친해져 마치 수학여행을 온 친구들처럼 장난을 치고 이야기도 나누며 걸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걸었기 때문인지 예정보다 일찍 사우아이코에 도착해 이른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 4박5일 팀과 서로 SNS 계정을 공유한 뒤 이별하고 차에 올랐다.
하이드로 일렉트리카는 생각보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참동안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야 했다. 얼핏 창밖에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직접 걸으며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컸다. 하이드로 일렉트리카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쿠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와서 마추픽추까지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며 기찻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팔이 따가워서 보니 점만 한 크기의 파리가 앉아 있다가 날아간 부위가 점차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흡혈 파리였다. 다른 일행들도 물렸는지 다들 벌레 퇴치제를 꺼내 바르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것이 얼마나 독한지 금세 엄지손가락만 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흡혈 파리와 씨름해야 했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보니 산중 디즈니랜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번화한 마을이었다. 3일 동안 야생에서 지냈기 때문에 더욱 문명이 반가웠다.
먼저 도착한 은진도 합류해 같이 걸어온 팀원을 소개할 겸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저녁을 먹으며 간단하게 한잔만 한다는 것이 한 병, 두 병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세모도 기분이 좋은지 먼저 나서서 클럽을 가자고 해 다같이 고대 잉카 문명 아래서 춤을 추다가 새벽 2시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사진에 다 담기지 않는 마추픽추의 아름다움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마추픽추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거나 1시간가량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세 시간 남짓 자고 새벽 5시에 모여 힘들 만도 할 텐데 모두들 걸어서 올라가겠다고 했다. 가파르기로 악명 높은 계단을 오르는데 마추픽추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산 아래에서는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없다고 해서 ‘공중도시’라고 불린다는 설명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렇게 한 시간을 오르고 나서야 드디어 입구가 나온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마추픽추가 눈앞에 펼쳐진다.
워낙 사진으로 많이 본 광경이지만 실제로 보니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3박4일이 아니라 30일을 걸어서라도 볼 가치가 있는 광경이었다. 남미 여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은 사진이 더 예쁘지만, 마추픽추는 사진이 실물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말이 도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잉카제국 멸망 이후 잊힌 이 도시는 1911년 미국의 학자 히람 빙엄Hiram Bingham이 원주민 소년의 증언을 토대로 실체를 확인한 후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와 같은 길을 따라 마추픽추를 찾았을 빙엄을 생각하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마추픽추의 수로는 너무나 정교해서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물웅덩이 하나 생기지 않으며, 현재까지도 특별한 보수 공사 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태양의 신전은 거대한 자연석을 활용해 특별한 가공 없이 지은 건물이죠. 철제도구가 전혀 없었던 시대에 지어진 도시인데도 정교한 석조건축과 조각술이 돋보입니다. 또한 산바람을 이용한 자연 냉장고를 개발해 서양문명보다 500년이나 앞서 식품저장 기술을 사용했어요. 이 냉장고에 감자를 넣어두면 6년이나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토록 대단한 도시를 지은 잉카인들은 흔적도 없고, 이젠 무수히 많은 관광객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래도 도시가 워낙 넓어 붐비지는 않았다. 한참을 둘러보며 잉카인의 숨결을 더듬어보다가 쿠스코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