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나라당이 4·9 총선 공천 후유증을 겪을 때 정치권에서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민주당이 가장 겁내는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탈당해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경우라는 것이다. 박 전 대표의 지도력과 대중적 지지도를 감안할 때 박 전 대표를 따라 당적을 옮길 의원이 적지 않을 것이고, 신생 야당으로서의 선명성도 분명해 민주당이 설 자리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박 전 대표가 걸어온 길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희박한 '탈당'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무게 있게 받아들일 필요 없는 그야말로 우스갯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박정희' 후광을 벗어버린 '정치인 박근혜'를 정치권에서 인정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해 그냥 웃어넘길 수만도 없었다.
“아버지 후광 벗어버린 박 前 대표의 실체를 親李는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대다수 친박(親朴)계 인사들은 이보다 앞서 2007년 8월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박 전 대표의 홀로서기가 시작된 시점으로 꼽는다. 당시 박 전 대표는 경선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 단상에 앉아 유정복 비서실장으로부터 "대표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안 된거죠?"라고 묻고는 몸둘 바 몰라하는 유 실장을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 이어 당당한 자세로 선거 결과에 깨끗히 승복한다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를 계기로 '정치인 박근혜'가 국민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고, 아버지 후광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됐다는 게 친박 인사들의 설명인 셈이다.
어찌 보면 2006년 5월 지방선거를 박 전 대표가 처음 홀로 선 시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병상에 누워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표심을 움직여 대전시장 판세를 막바지에 뒤엎는 드라마를 연출했으니 말이다.
친박 무소속 후보가 친이(親李) 한나라당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 4·29 경북 경주 국회의원 재선거 결과 역시 자립한 '정치인 박근혜'의 파워다. 한나라당은 '미워도 다시 한번'을 외치며 지난 총선에서 떨어졌던 한나라당 후보를 밀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민심은 '박근혜'였다. 지난해 4·9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 과정에서 탈락한 친박 후보들이 대거 당선된 데 이어 다시 '정치인 박근혜'의 힘이 확인된 것이다.
이젠 보편화된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 전 대표 별칭에는 간과해서 안 될 의미가 내포돼 있다. 박 전 대표가 전국 어디에서든 표를 모을 수 있으며, 어느 선거에서든 당락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 지도자의 역량을 비교할 때 흔히 그 지도자가 선거에서 지지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는 확률을 따진다. 그런 면에서 박 전 대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 실험적으로 입증됐다.
4·29 선거 이후 친이계에 박 전 대표를 포용하라는 목소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정치 중심에 홀로 서 있는 박 전 대표의 실체를 친이계가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와 권력을 나누면 레임덕이 가중될 것이며, 다음 총선에서 친이계가 전멸할지 모른다면서 지금까지 박 전 대표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둬 친이가 얻은 게 과연 무엇인가.
여당 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구속된 바 있는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 전 의원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 세력이 일부 있다. 이들이 행여 '박정희의 딸 주제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버리는 게 낫다. 거듭 강조하지만 박 전 대표는 이미 홀로 서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물고뜯으면 박 전 대표가 상처를 입고, 자신들은 이익을 볼 것으로 여기면 착각이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im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