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만에 오른 남미 안데스산맥 6,000m급 고산 등정 스토리
남미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융기한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 안데스. 광활한 안데스산맥 중앙에 위치한 산이 ‘후아이나 포토시Huayna Potosi’다. 볼리비아의 코르디예라 레알Cordillera Real산군에 솟았으며, 수도 라파즈La Paz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져 있다. 해발고도 6,088m인 후아이나 포토시는 일반 등산인이 정상을 밟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산이다. 그래서 혹자는 세계에서 가장 쉬운 6,000m급 산이라고도 한다. 이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의 상승 고도가 1,400m 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램폰과 피켈을 이용한 빙벽 구간이 있기에 결코 만만하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볼리비아를 거치는 등산 마니아라면 누구나 도전하는 인기 있는 코스지만, 빙벽 구간에서 포기하고 내려오는 이들이 많다.
12월 28일,미지의 성공 확률을 갖고 나는 에이전시를 찾았다. 후아이나 포토시 정상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내 생애 가장 높은 산 등정 기록을 후아이나 포토시에서 세울 계획이었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 중심가에 위치한 벼룩시장, 일명 ‘마녀시장’을 따라 비탈길에 들어서자 상점이 즐비하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모험가들을 기다리는 에이전시에 들어가 옵션과 가격을 확인했다. 혹시 모를 고산병과 악천후를 대비해서 하루의 여유를 더 갖되, 등반 장비는 빌리지 않는 조건으로 가격을 흥정했다. 후아이나 포토시의 가이드들이 정상 직전의 빙벽 구간에서 겁을 주며 포기를 종용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꼭 정상을 밟을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 뒤 에이전시를 나왔다.
다음날 아침, 배낭을 꾸리고 에이전시로 향했다. 담당 가이드 로키는 나와 미국인 롭을 데리고 장비 대여점으로 갔다. 롭은 1박2일 코스라 베이스캠프(4,600m)까지만 동행하고, 2박3일 코스인 나는 다른 가이드와 함께 하이캠프(5,130m)로 이동한다고 했다. 빙벽장비와 부족한 방한복을 추가로 챙긴 후 준비된 차량에 올랐다.
해발 3,600m 고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 라파즈를 벗어나자 곧장 비포장길이었다. 차창 밖으로 오렌지색 성냥갑 같은 집들이 빼곡했다. 먼지를 날리며 한 시간 정도 달리자, 파란 하늘은 어느새 검은 먹구름 뒤로 자취를 감췄고, 달갑지 않은 콩알만 한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가이드의 지도로 빙벽등반과 구조 연습을 할 예정이었지만, 롭의 가이드가 전날 과음으로 오지 못해 로키는 롭과 함께 정상에 다녀와야 한다며 자유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빙벽등반 경험이 없었기에 연습을 하고 싶었는데, 이 황당한 상황에서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라파즈로 돌아가면 에이전시에 클레임을 걸겠다고 다짐하며, 고산적응 겸 하이캠프로 가는 길을 나섰다. 베이스캠프 옆 종고Zongo 댐을 건너 언덕을 오르자 자욱한 안개 너머로 하이캠프로 향하는 대여섯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들 중 몇은 걷기가 버거운 듯 숨을 고르며 몇 번이고 멈춰 섰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해발 4,000m대 고지대를 걷는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히말라야나 알프스, 지금 안데스에서도 고산병 증세가 전혀 없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며 쉬엄쉬엄 걸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그들은 자정이 되면 롭과 함께 정상을 향할 것이다. 하이캠프 매표소에 이르자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나는 다시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미국인 롭의 제안을 거절하다
하산 길에 만난 롭은 심심하면 오늘 정상에 함께 도전하자고 청했다. 내일은 날씨가 더 좋을 것 같다며 웃으며 거절하자, 날씨가 나빠도 꼭 정상을 밟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조금 초조하던 나도 덩달아 자신감이 생겼다. 그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날씨를 확인했다. 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렸다. 초조함이 되살아났다. 산장지기가 준 맛없는 정체불명의 스프를 오직 배를 채우겠다는 일념으로 입에 떠 넣고 있는데, 전날 정상을 향했던 롭과 로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날 새벽 정상에 도전한 사람은 가이드를 제외하고 7명이었지만, 롭과 어제 만난 아르헨티나 팀의 남자 한 명만이 정상을 밟았다고 한다. 정상의 기상상태가 나빠 나의 성공 확률 또한 낙관적이지 않았다. 로키는 스프를 들이마시고 곧장 출발 준비를 했다. 초조함과 불안감까지 더해 한층 더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롭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Good Luck!” 롭은 정상을 밟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며 격려해 줬다. 트레킹을 하면서 항상 다짐하는 건 완주가 아닌 즐겁게 걷는 것이지만, 생애 첫 6,000m대 산 등정을 앞두고 초연하기는 어려웠다. 하늘이 후아이나 포토시 정상을 허락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눈은 그쳤지만, 하이캠프로 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매표소(4,965m)에 도착하자 가파른 너덜길이 나타났다. 자칫하다가는 자갈 무더기와 함께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무거운 배낭으로 인해 행여 중심을 잃을까 온 신경을 발끝에 모아 조심스레 올라야 했다.
20여 분을 오르자 바위를 다듬어 만든 계단이 나타나 걷기가 수월해졌다. 심술궂은 안개는 여전히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돌계단 끝에 위치한 붉은색 하이캠프는 더없이 초라해 보였지만, 내부는 하룻밤 쉬어가기에 나쁘지 않았다. 30개 남짓의 침대는 모두 비었고, 넓은 방을 혼자 사용했다.
가이드 로키는 백지장같이 얇고 거무튀튀한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와 바람에 날릴 것 같은 남미 특유의 푸석한 쌀 위에 성의 없게 뿌려진 케첩이 담긴 접시를 내왔다. 실망스러운 음식 모습과 긴장감에 짓눌려 그나마 남아 있던 나의 식욕은 깡그리 사라졌다. 접시를 밀어내고, 테이블 위에 준비해 둔 비스킷과 차로 식사를 대신했다.
시간이 갈수록 불안과 초조함은 머리를 조여오고 있었다. 방에 들어와 누웠다. 텅 빈 방안의 찬 공기는 불안정한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전날 롭과 함께 오르지 않은 걸 후회하며,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관자놀이에서 울려퍼지는 맥박 소리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2시간이 흘러 있었다. 긴장은 누그러졌고, 컨디션도 회복되었다. 오후 4시, 산장 밖으로 나갔다. 심술궂은 안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꿈을 꾸는 듯 믿기 어려운 황홀한 풍경이 펼쳐졌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고산의 향연, 하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운해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폭신해 보였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은 운해 위로 드러난 코르디예라 레알산군의 만년설에 닿아 있었다. 바로 “천국의 정원이 바로 여기구나”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뒤편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안개 때문에 보지 못했던 위쪽에 산장이 더 있었고, 몇 명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혼자가 아닌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출발시간인 자정에 맞추기 위해 산장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낮잠을 잔 탓인지 어둠 속에서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고,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 11시. 잠이 들었었는지 알 수 없다. 비몽사몽 문을 열고 나와 로키가 차려 준 스프를 마주했다. 여전히 식욕은 없었지만, 점심도 굶은 터라 단숨에 들이켰다. 미친 듯이 문을 흔들어대는 바람 소리에 겁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무거워진 몸에 장비를 하나씩 장착하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근만근이었지만, 기계처럼 움직였다.
가는 눈발과 함께 강한 바람이 내 볼을 꼬집었다. ‘이런 악천후에 올라가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로키는 아무렇지 않게 출발하자고 했다. 그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여기며, 피켈을 짚어가며 어두운 바윗길을 올랐다.
앞쪽으로 희미하게 움직이는 몇 개의 불빛이 보였다. 낮에 봤던 다른 산장 팀이었다. 오르막에 집중하자 몸이 데워지며 걷기가 수월해졌다. 눈길이 나타나고 로키는 로프를 꺼내 나의 하네스에 줄을 걸었다. 푹푹 빠지는 눈은 두 발을 땅 속으로 잡아끌었다.
내게 경치를 볼 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버틸 만했고, 내 생애 최고봉을 오르고 싶었다. 6,088m의 정상을 밟고 싶다며 로키에게 부탁했다. 그는 체념한 듯 먼저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피켈을 찍은 위치와 크램폰 자국을 그대로 따라 올랐다. 날이 밝아오자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가 드러났다. 고도감에 대한 공포가 더해져 얼음과 눈이 뒤섞인 빙벽은 나를 자꾸만 밀어내는 듯했고, 얼어붙은 손과 발끝은 힘이 빠지고 있었다. 빙벽등반이 처음이었기에 요령 없이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체력 소모가 급격히 커졌고 당혹감이 나를 괴롭혔다.
후회 속에 오른 생애 첫 빙벽등반
눈보라가 거세 눈을 뜰 수 없었다. 로키의 줄에 의지해 방향을 가늠하며 한참을 오르자 먼저 간 팀이 쉬고 있었다. 팀원 중 일부가 지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하고 추월했다. 이윽고 평평한 공간이 나오자 로키는 잠시 쉬어가자며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아무리 가이드라도 이틀 연속 밤을 새며 정상을 밟는 건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쉬고 있는 사이 다른 팀이 올라왔다. 가이드와 남자 두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포기하고 내려갔다고 했다. 그들이 앞장서고, 우리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빙벽 구간이 나타났을 때, 이미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로키는 날씨가 너무 안 좋아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며 이 정도면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빙벽 구간도 얘기 들었던 것처럼 직벽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어차피 올라가봤자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며 다시 한 번 나를 설득했다.
이미 올라가겠다는 말을 뱉어놓은 터라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를 악물고 올랐다. 마침내 빙벽 구간 끝까지 올라섰지만, 로키는 쉴 틈도 주지 않고 앞선 이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나의 걸음은 점점 속도를 잃어가고, 눈보라가 심해져 발자국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연결된 로프가 팽팽해지는 걸 느낀 그는 잠시 뒤돌아볼 뿐 좀처럼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고집에 대한 응징일까? 더 이상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로키에게 쉬어가자고 했다.
나는 물에 녹아내리는 휴지처럼 바닥에 주저앉았고 미친 듯이 날리는 눈은 금세 내 몸을 덮어버렸다. 저쪽에서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세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시루떡처럼 뻗어 있는 나를 보며 정상이 바로 앞이라며 힘을 내라고 격려해 줬다. 그들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등을 보이며 내려가는 그들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정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초속 1cm의 속도로 느리게 걷는데 로키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정상이라는 말을 대신했다. 코르디예라 레알의 멋진 첩첩산중 고산 경치를 기대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건 로키와 나뿐이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이 하얀 블랙홀처럼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제 내려가자는 그에게 카메라를 건네고, 태극기를 꺼냈다. 방금 전까지 땅으로 꺼져버릴 듯 지쳐 있던 내가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으려 들자 로키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끝났다고 방심한 순간 크레바스에 빠져
정상 등정의 기쁨에 엔도르핀이 마구 솟아났는지, 하산 길은 힘차고 순조로웠다. 다만 빙벽 구간에 도착했을 땐, 낭떠러지가 훤히 보이는 탓에 주춤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미리 말해 뒀던 터라 로키는 내게 로프에 의존해서 내려가라고 했지만, 더 이상 그에게 짐이 되기 싫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크램폰을 찍으며 클라이밍다운으로 내려갔다.
빙벽 구간을 지나자 말라붙은 논바닥처럼 신경질적으로 갈라진 크레바스 구간이 나왔다. 그칠 줄 모르는 눈이 발자국을 지워버려, 로키는 피켈을 바닥에 찍으며 안전한 길을 찾아 걸었다. 크레바스를 뛰어 넘을 때마다 그가 빠질 위험에 대비해 로프를 적당히 잡고 확보를 하고 있었다. 그가 무사히 건너면 그의 발자국대로 뛰어 넘었다. 크레바스 구간이 끝날 무렵 눈이 그쳤다.
거의 다 왔다며 안심하는 순간,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하얀 눈이 순식간에 가슴까지 치고 올라왔다. 로키와 연결된 로프가 팽팽해졌다. 오직 양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끝났다고 방심한 순간 발을 헛디뎌 크레바스에 빠진 것이다. 로키는 로프를 당기며, 크램폰으로 벽을 차고 올라오라고 했다. 크램폰은 쉽사리 벽에 박히지 않았고 헛발질만 할 뿐이었다.
지금껏 내가 산을 다니며 가장 기억하기 싫었던 순간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겨우 크레바스에서 빠져 나오자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고마움과 미안함, 창피함이 교차했다. 고집을 부렸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말없이 그의 발자국을 보며 걸었다.
안전한 평지가 나오자 로키는 좀 쉬어가자고 했다. 그는 주눅 든 나를 의식했는지, 미안하면 그 작은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그의 농담에 웃으며 대신 멋진 사진과 맥주 한잔을 사겠다고 했다. 한바탕 소동 후 기합이 들어간 내 두 다리는 번개처럼 하이캠프를 지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정체 모를 고깃덩어리를 최고급 한우를 씹듯 소중하게 되새김질 했다.
악천후 속에서 힘겹게 해발 6,088m 등정에 성공한 나는 라파즈에 도착하자 로키에게 감사의 팁을 주었다. 물론 빙벽 훈련을 누락한 괘씸죄에 대한 클레임도 없었다.
항상 본능에만 충실했던 나는 후아이나 포토시를 오른 후 여행관이 달라졌다. 새로운 곳은 과감히 도전하되, 위험 요소가 있다면 절대 무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글이 월간<山>에 실리는 7월이면 나는 파키스탄 히스파르빙하를 걷고 있을 것이다. 후아이나 포토시에서 배운 가치를 가슴 깊은 곳에 안고서 말이다.
■현지 에이전시 등반 일정
2인1조 기준 1박2일 700볼. 2박3일 850볼, 입장료 1인당 20볼, 장비렌탈비 포함.
1인 1가이드 기준 2박3일 950볼(일부 장비가 있을 경우 네고 가능), 입장료 20볼
1박 2일 첫째날-베이스캠프(4,600m)로 이동 후 바로 하이캠프로 약 3시간 이동 후 숙박
둘째날-하이캠프(5,130m)에서 정상까지 약 6시간 등반 후 바로 베이스캠프로 하산.
2박 3일 첫째날-빙벽기술 훈련 및 고산 적응을 위해 베이스캠프 숙박
둘째날-하이캠프로 이동 후 숙박
셋째날-하이캠프에서 등정 후 베이스캠프로 하산.